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번째날
#열번째날(2019.10.30)
1.
오후에 비 온다는 예보에 서둘러 숙소를 떠났다. 여명이 살짝 드리울 정도다.
묵었던 동네는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없다. 1시간을 걸었더니 새로운 동네 칼사다스에 들어섰고, 바르가 문을 열었다. 어제 저녁을 안 먹어서 아이들은 비교적 든든하게 아침을 먹는다. 시하가 여전히 컨디션이 나쁘다고 한다. 잠도 잘 잤고, 미열도 없고, 근육통도 없다. 힘이 들 때도 됐다. 체격이 커서 100km 이상 걸은 게 부담이다. 그래서 시하 배낭을 내가 들어주기로 했다. 말이나오자마자 태호도 자기 배낭을 맡기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미안하긴 한가보다.
2.
작년 5월에 나 혼자 사진 찍은 장소에서 아이들을 세우고 사진 찍었다. 두 사진을 나란히 편집했다. 작년 사진은 폰에 있지 않아서 페북에서 내려받은 것이고, 사진 몽타주는 모바일 앱 버전 포토샵을 이용했다. 내가 얼리아답타 아닌 늦된 아답타이지만 신기하긴 신기하다. 걸으면서 그런 작업이 모두 가능하다니....
3.
칼사다스에 작년에 없던 대형 벽화가 있다. 밤하늘에 보이는 세 명의 위대한 성인이다. 아이들은 왼쪽 두 사람을 금방 알아본다. 아인슈타인과 간디. 그러나 오른쪽 흑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마틴 루터킹 목사다. 킹 목사가 위대한 성인인 건 분명하지만 스페인 벽화에 아인슈타인과 간디와 더불어 쓰리샷에 등장하는 건 의외다. 좀더 생각해보니 유럽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을 고르게 배치한 의도라고 봤다.
4.
1863년 그러니까 150년도 더 전에 미국 링컨 대통령은 흑인노예해방을 선언했어. 그전에는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납치한 흑인들은 법적으로 주인의 재산인 노예로서 인권이 전혀 없고 사고 파는 게 가능했지. 흑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야. 말하는 짐승일 뿐이었어. 미국은 1863년 이후 법적으로 흑인을 사람으로 대접했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어. 더구나 1863년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어. 남북전쟁은 미국의 내전이야. 미국 남부는 연방에서 탈퇴해서 링컨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지. 링컨은 인권주의자로 한국에 알려졌지만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고 전쟁 전략가야. 더도덜도 아니고 말이야. “40살 이후의 얼굴은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라는 꽤 유명한 말을 남긴 미국의 150년 전 대통령으로 기억하면 돼. 당시 미국은 유럽이 산업혁명을 완성하고 식민지 개척에 나서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걸 보고 부러워했어. 원래 미국이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다시 유럽의 부속품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웠던 거지. 그래서 링컨은 미국도 유럽처럼 산업혁명을 완성하고 후발 제국주의자로 행세하고 싶었던 거야. 산업혁명이 뭐냐고? 기계를 써서 물품을 빠르게 엄청 많이 생산해서 싼 값에 대량판매하는 걸 말해. 옷도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고, 곡식도 기계방아로 찧어서 빨리 그리고 많이 밀가루를 생산하고, 목재도 기계톱을 써서 빨리 그리고 많이 생산해서 집도 짓고 교회도 짓고.... 설탕도 빠르게 많이 생산해서 사탕도 만들고 케이크도 만들고, 만든 물건들은 기차로 배로 대량 실어나르는 세상을 말하지.
결국 세상에 없던 공장이 필요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꼭 필요한데 농장 보다는 공장이 많은 미국 북부는 노동자가 부족했어. 링컨은 남부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노예를 공장에서 일하게 하려고 했던 거야. 밀밭이나 목화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의 일하는 내용과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노예를 공장에서 일하게 할 수 없었어. 또한 노예는 돈이 없어서 물건을 살 수 없으니까 노동자에게 월급을 줘서 물건을 사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던 거지. 뭐 더 복잡한 얘기는 다음에 듣기로 하고.... 링컨이 노예해방문서에 서명한지 꼭 100년이 지난 1963년에 루터킹 목사는 유명한 연설을 하게 돼. “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아주 유명한 연설이야. 루터킹 목사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흑인도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내용이었어. 100년이 지나도록 노예는 아니지만 흑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삶이 피폐한 건 마찬가지였어. 20세기 들어와 미국이 1차세계대전에 슬쩍 한발을 걸치고, 2차세계대전에 주도적으로 참전해서 승전국의 대표가 되고 곧이어 1950년 한국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건 대부분 흑인을 군인으로 사용해서야. 당시 흑인들은 책을 읽을 수 없었어. 일부러 교육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흑인이라고 머리가 나쁘거나 학습에 뒤질 이유는 전혀 없어. 하지만 흑인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거나 특히 대학에 진학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어. 흑인은 아예 입학 자격을 주지도 않았어. 흑인이 선거권을 가진 건 1965년에 이르러서야. 그러니 1963년 루터킹 목사의 연설은 많은 흑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어. 바로 싸우겠다는 용기와 나도 백인과 다르지 않은 인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이지. 때론 희망을 갖는 것만으로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어.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마찬가지야. 마틴 루터킹 목사는 1968년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암살 당해. 전 세계는 충격을 받아. 루터킹 목사는 40살도 안 돼 죽었지만, 루터킹 목사가 죽어서 미국 흑인의 인권은 더욱 보장되는 변화가 일어나. 그래서 루터킹 목사가 살았을 때 노벨평화상을 받은 거야. 왜 벽화에 루터킹 목사가 그려져 있는 지 알겠지.
5.
태호는 카스트로헤르스의 알베르게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행동을 한다. 우리가 알베르게에 두번 째 도착 손님이다. 우리 이후로 줄줄이 순례꾼들이 들어왔다. 이 동네 유일한 공립 알베르게이기에 많지 않은 숫자의 침상은 대부분 찼다. 나는 밀린 일기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침상 옆 의자에서 열심히 엄지를 움직이고 있었다. 3시간이 훌쩍 지났나보더라. 시하는 도착하면서 계속 침상에 누워 있었다.
태호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서 찾아나섰다. 좁은 로비에 여러 나라의 순례꾼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 역시 가장 많은 순례꾼은 한국 사람이다. 한국 순례꾼 뿐만 아니라 알베르게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태호가 있었다. 낯선 사람, 특히 외국인이라면 가까이 가지 않았던 태호였다. “올라”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다니며 끼어드는 태호를 봤다.
한국 20대 청년에게는 자신을 마켓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도 한다. 자신이 사온 푸딩과 형들이 사온 중국 컵라면을 바꿔 먹기도.... 태호는 중국 컵라면은 근처도 가지 않았던 녀석이다. 풍미가 한국 제품과 다르다는 이유로. 알베르게에 비치된 카드로 형들과 카드놀이를 하더니, 외국인과 짝을 이뤄 걷는 한국인 누나에게 카드놀이 하자고 조른다.
태호의 이 모든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 용건을 말하고, 부탁하고, 제안한다? 지금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쟤가 태호 맞아?”
태호가 그동안 한가한 알베르게를 싫어했다. 사람 북적이는 알베르게로 가자고 몇 번 졸랐다.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특정 개인이 만들지 않는다는 주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아이덴티티는 그때 그때 다르다. 어찌 보면 중국 전통 변검술처럼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가 장소와 분위기에 맞는 놈으로 뽑아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제시한다고 봐야한다.
그러니 내가 너이고 네가 나라는 말이 성립한다.
6.
시하는 저녁 먹을 때부터 기운을 차렸다. 달리 먹을 식당이 없어서 알베르게에 준비된 재료로 토마토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였다. 아침에 10km를 걷고 오르니요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하가 더 이상 걸을 힘이 없다고 해서 고민하다가 택시를 불러 카스트로헤리스로 이동했다. 이틀 동안 10km씩만 걸어서 부족한 거리를 만회했다. 점점 늦추면 예정된 날짜에 산티아고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택시를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택시비가 비싸다. 한국의 두 배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