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서른한번째날
#서른한번째날(2019.11.20)
1.
걷는 게 이력이 난 느낌이다. 그냥 걸어지는 느낌.... 생각을 잘라내고 싶다가도 머릿속이 텅 비는 것이 반갑지 않다. 뭔가를 끄집어내서 생각은 꼬리를 무는 법이다. 머리를 비우겠다는 마음 자체를 비워야 하는가 보다.
2.
태호아빠는 일부러 시간을 내고 비용을 들여 스페인에 아들을 보러 온 것이라 태호에게 지극정성이다. 태호의 곁에서 걷는 시간도 많다. 태호도 아빠 손을 먼저 잡는 일이 많다. 하기야 억지로 손을 잡는다고 계속 손 잡고 걸을 태호가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태호아빠는 태호의 긍정적 변화를 바라고, 변화의 추이를 살핀다.
사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탁월한 그림책이 있다. <내 이름은 자가주> 퀸틴 블레이크 작품이고 원제는 <Zagazoo>이다. 퀸틴 블레이크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로알드 달 작품에 항상 삽화를 그린 사람인데 직접 글까지 쓴 작품이 <Zagazoo>이다.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부부에게 어느 날, 이상한 소포 하나가 도착한다. 소포 안에는 '자가주'라는 분홍빛 생물이 들어있다. 자가주를 키우는 게 항상 즐거운 건 아니지만, 사랑스러운 자가주의 미소는 모든 걸 극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 자가주가 빽빽 울어대는 대머리 독수리가 되고, 집 안을 한껏 어지르는 코끼리가 되고, 멧돼지가 되면서 부부의 삶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간다. 이 변화무쌍한 괴물 때문에 삶은 불안하고, 사고를 수습하느라 몸이 피곤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가주가 매너 좋고 말끔한 청년이 된다. 예쁘고 마음이 맞는 아가씨를 만난 자가주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부모님을 찾아갔을 때, 지금까지의 상황과는 반대로 부모님이 갈색 펠리컨이 되어 부리를 딱딱거리고 있다.
사람의 변화를 점진적인 변화로 이해하게 된 건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부터다. 산업사회는 세상을 공정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는 인식도 서구의 산업사회 전면화 영향이다.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산업사회 인식이다.
사람은 <Zagazoo>처럼 변한다. 독수리인지 멧돼지인지 코끼리인가 모르다가 어느 날 예의 바른 어엿한 청년이 돼서 나타난다. 어엿한 청년은 독수리와 멧돼지와 코끼리의 총체이며 동시에 독수리, 멧돼지, 코끼리를 넘어서는 초월체라 할 수 있다.
<Zagazoo>의 탁월성은 세월이 흘러 자기주가 청년이 되니까 젊었던 부부는 갈색 펠리컨이 되어 날아간다는 표현이다. 자가주가 소포를 통해 온 것과 부부가 갈색 펠리컨이 돼서 떠나는 것을 시작과 끝으로 묘사할 수 없다. 변화는 무한하고, 따라서 시작도 끝도 없는 게 아니겠는가. 우주가 그런 것처럼.
3.
드디어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았다는 지표석을 지났다. 아이들이 환호한다. 마치 100km를 한달음에 갈 것처럼 생각한다. 군대 가도 두렵지 않다는 말도 한다^^ 이건 완전히 숫자 상징의 세뇌다. 때론 세뇌도 필요하다. 어쩌면 교육은 크게 보면 세뇌가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