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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Nov 08. 2024

내가 작별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울엄마 박춘섭

ⅳ. 울엄마 박춘섭     


1982년1월4일 아침이었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이고, 반 친구들과 원단 인사를 드리러 담임 선생님 댁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담임 방문은 점심 이후로 시간을 잡았다. 엄마는 아침 식사 후 가족들이 일터로 나가고 나만 남았을 때 말했다.

“막내야, 아랫목에 앉아봐. 내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응. 무슨 말인데?”

“지금이 아니면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형들한테도 하지 못한 말이지만, 너에게는 얘기하고 싶어.”

반 친구들과 담임 방문 약속을 위해 일어날 때까지 네 시간 정도 엄마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중에 한 시간은 내가 우는 시간이었다. 간간이 엄마를 부둥켜안기도 했지만 대부분 책상다리로 앉은 채 엎드려 울었다. 펑펑 울었다.

박춘섭은 26년10월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래원은 26년 6.10만세운동 관련 체포돼서 옥중에 있을 때 태어나서 할머니 손에 컸다. 박춘섭의 할아버지가 손병희를 이은 천도교 4대 교주 춘암 박인호라서 운현궁 근처에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 엄마의 엄마 조덕자는 1900년 생이고 남편의 투옥 이후 옥바라지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할 일이 너무 많아 맏딸을 서대문에 별도로 사는 할머니에게 맡겼다. 엄마가 선택할 수 없는 태생의 배경으로 엄마의 힘든 삶은 이미 예정됐다.

엄마는 동덕고녀(옛날엔 여고를 고녀라고 불렀다. 동덕은 천주교의 ‘자매님’에 해당하는 천도교 호칭이다)를 나왔고, 어른이 됐다. 곧 해방을 맞았고, 잠시 지금의 새마을금고에 해당하는 무진회사에 다녔다. 아버지가 5년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뒤 종교인으로서 살아갔지만, 6.10만세운동이 천도교와 조선공산당의 합작이라는 멍에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박래원(나의 외할아버지)의 좌파 딱지는 해방 정국에서 매우 위험한 낙인이라 집안은 물론 천도교 세력에게 큰 위협이었다.

좌파 독립운동가 암살이 횡행하던 시절에 박래원은 가평 골짜기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청년에게 맏딸을 시집보냈다. 박춘섭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결혼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공포감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춘천으로 이사했고, 남편은 직업군인이 되겠다며 입대했다. 아주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도 일했다. 딸도 태어났다.

1949년 어느 날 남편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물어물어 수소문하니 남편이 소속된 부대 대대장이 대대 병력 전체를 이끌고 월북했단다. 당연히 더 이상 남편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6.25가 터졌다. 박춘섭은 돌쟁이 딸을 업고 춘천 남면의 좌방산과 서면의 삼악산을 넘었다. 캄캄한 밤에 바위산을 기어서 넘은 적도 있다. 전쟁이 터졌으니 곧 좌익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할 거라 모두가 말했다. 박춘섭은 아버지가 빨갱이 딱지였고, 남편도 북으로 간 사람이 됐기 때문에 영락없이 죽을 테니 빨리 춘천을 뜨라는 말에 공포심에 떨며 산을 넘은 것이다. 길을 따라가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피딱지가 앉아도 학살의 공포보다는 안심이 된다. 가평을 찾아간 것이다. 가평에 시댁이 있었다. 아기를 업고 나타난 며느리가 시부모는 무서웠다. 좌익 빨갱이 며느리 때문에 멸문지화를 입을까 두려웠다. 춘천이나 가평이나 38선 언저리이다. 인민군이 이미 가평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간 상황이다. 시부모는 얼른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한다. 

박춘섭은 하염없이 남으로 걸었다. 아기를 업고 보따리를 하나 들었다. 동네를 만나면 구걸하고 피난민을 만나면 속으로 파고들었다. 서로가 모르는 남이니 단지 불쌍한 아기 엄마였을 뿐이다. 날씨가 더워서 죽지 않았다. 야외에서 모기밥이 된다고 죽지는 않는 법이니까.

“엄마…. 왜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가지 않았어? 천도교를 찾아가면 누구든 도움을 줄 거잖아.”

박춘섭은 이미 자기 부모는 우익 세력에 죽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자신이 서울에 가는 건 죽으러 가는 것이라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익의 집단학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당시 누구나 4.3이나 국민보도연맹에 대해 소문을 듣고 있어서 사람 목숨 파리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서울은 국민보도연맹 희생자가 없었지만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남으로

남으로

오직 딸아이는 살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식량을 구걸하며 걷고 또 걸었다.

어디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길을 걸을 때 업은 아기 모가지가 옆으로 스러졌다. 열이 좀 난다고 생각했지만, 아기는 등에서 죽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다. 이제 목표가 아기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한다로 바뀌었다. 슬픔보다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업고 걷는 일은 삼악산을 넘을 때보다 힘들었다.

충북 영동을 지날 때였다. 피난민 행렬에 인민군이 끼어들어 같이 움직인다는 명분으로 미군은 행렬이 보이면 죽인다고 한다. 함께 줄지어 걸을 수도 없다. 박춘섭은 실제로 그런 상황을 겪었다. 미군 쌕쌕이가 폭탄을 피난민 행렬에 떨어뜨렸다.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폭탄은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한번 파인 웅덩이로 또다시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행렬은 맹렬하게 웅덩이로 뛰어간다. 박춘섭은 이미 폭격에 죽은 시체들, 팔 다리 몸뚱이 머리 다 흩어진 처참한 시체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달렸다. 내가 저렇게 사지가 갈기갈기 찢길 수 있다는 생각에 시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웅덩이 안에서 쌕쌕이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으면 기어 나와 다시 걸었다. 미군 폭격을 목격한 사람들은 무서워서 낮에는 그늘에서 앉아있다가 밤에 주로 걸었다. 강폭이 꽤 되는 하천을 나룻배로 건널 때였다. 오밤중이었다. 배 한 척에 열댓 명이 타고 한 사람이 노를 저었다. 강 가운데서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아기 아빠는 아기의 다리를 잡고 거꾸로 강물에 집어넣었다. 다른 손으로 아기 엄마의 입을 막으며. 그 배에 박춘섭도 있었고, 내 엄마는 그 장면을 나에게 설명했다. 

(오밤중 도강하다가 아기를 강물에 빠트리는 이야기는 충북 영동군 노근리평화공원에 가면 영상에 똑같이 나온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 아이들과 학습여행을 가다가 노근리평화공원에 갔고, 거기서 상영하는 애니메이션 형식의 기록 다큐멘터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용이 82년1월 엄마에게 들은 그대로이다. 정말 크게 놀랐다.)

미군 폭격은 어마어마했다. 사람이 모였다 싶으면 폭탄을 쏟아부었다. 더 이상 남하는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히려 오던 길을 돌아가면 인민군도 없고 미군 폭격도 없다고 말하며 피난 행렬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춘섭도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같이 움직였다. 그래야 죽지 않을 만큼이라도 먹을 게 생긴다.

음성읍에 들어갔다. 온몸이 떨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혼절해서 풀밭에 쓰러져 있는데 누군가 흔들어 깨운다. 먼저 자기가 동덕고녀 선생이었다고 말해서 박춘섭은 나중에 흔든 이를 알아봤다. 선생은 박춘섭에게 학질을 앓고 있는 거라 말한다. 해열제를 주고 선생은 떠났다. 조치가 없으면 죽을 것이라 말하며, 미안하다고 한다. 얼른 의사를 만나야 한다고 덧붙이고. 집도 절도 없는 젊은 홀몸 아줌마는 낯선 음성 땅에서 절망한다.

박춘섭은 청년이라기엔 나이가 많고 중년이라기엔 다부진 외모의 지나가는 아저씨를 무작정 붙잡았다. 아직 죽기 싫어요. 살려주세요. 의사를 만나서 약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데 도와주세요. 해가 바뀌어 1951년이 됐고, 한겨울은 지나 봄기운이 돌 때였다. 충청도 시골은 전쟁의 기운이 가셨다. 피난민은 집으로 돌아왔고, 부서진 집도 없었다. 매정하지 못한 아저씨는 박춘섭을 의사에게 데려갔다. 학질(말라리아)은 개똥쑥을 달여 먹으면 치료가 가능하다. 정확히 어떤 경로인지 기억이 없지만 어쨌든 길 가는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박춘섭은 살았다.

1912년 생 아저씨는 쌀 도매상이다. 동네 쌀을 모아 서울에 팔기 때문에 일본놈들이 광산에서 쓰던 도락꾸를 이어받아 주로 하는 일은 운전이었다. 박춘섭은 친정 정보만 숨기고 혼자서 피난 중인 상황을 자연스럽게 아저씨에게 말했다. 어느 날 아저씨와 아저씨 부인이 박춘섭을 찾아왔다. 우리는 딸만 셋 있어요. 새댁이 아들만 낳아주면 재산을 좀 떼어주겠소. 우리 부탁을 들어주세요.

박춘섭은 1952년10월에 아들을 낳았다. 나의 맏형이다. 박춘섭은 아들을 낳았으니 생부에게 주고 음성을 떠나 서울로 가려고 했다. 서울도 안정됐으니 친정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도움을 받으려면 서울 친정으로 가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기 생부가 박춘섭을 잡고 매달렸다. 같이 살아주소. 그러다보니 54년생 아들, 56년생 또 아들을 낳았다.

네 아버지는 셋째를 임신하자 엄마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신당동에 집을 얻고 쌀장사를 계속했다. 본부인은 왕십리에 집을 한 채 사주고 딸들 뒷바라지를 하도록 했다. 내 맏형과 둘재 형은 음성에서 지낸 정으로 아버지의 본부인을 큰엄마라고 부르며 신당동에서 가까운 왕십리를 왕래했다. 그 후 청와대 근처 팔판동으로, 지금 신라호텔에 붙은 장충동으로 이사하고, 나는 장충동에서 태어났다. 어버지 장사는 망해서 엄마가 털실 스웨터 공방을 운영하며 먹고 살았는데 엄마는 너무 쇠약해서 자주 기절했다고. 병원에 갔더니 아기를 낳으면 틀어진 몸이 제 자리를 잡으며 건강을 회복한다고 했고, 엄마는 나를 낳았다.

“이게 내 역사이고 너를 낳은 전후 스토리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수 있어서 말한 거야.”

왕십리 사는 큰엄마 존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고, 초2 때 배다른 누이들이 쳐들어와서 엄마 머리채를 잡고 흔든 일은 어린 나에게 세상을 조용히 탐구하도록 만든 우울 에너지였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두 아내가 있다거나, 엄마가 첫 결혼에 딸을 낳은 적도 있다는 건 이슈가 되지 않았다. 젊은 새댁이 홀로 6.25를 관통하며 겪은 몸고생, 공포, 마음의 상처, 죽고 싶을 때는 없었겠는가. 그날 난 엄마의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르는 고통을 그대로 느꼈다. 너무 울어서 오후에 만난 담임이 내 눈치를 보며 겨우 물었다.

“너 뭔일 있냐? 눈이 왜 밤탱이가 된 거니.”

“선생님은 몸뚱이가 반으로 잘린 시신을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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