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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by 박달나무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 저, 노시내 번역, 마티, 2021

캐시 박 홍 작가의 시집 <몸 번역하기>도 미국에서 상당히 알려질 정도로 필력이 대단하다. 나는 번역본을 보기 때문에 번역가의 능력도 출중하다고 생각했다. 번역서가 아니라 글빨이 좋은 한국 작가가 쓴 에세이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이너 필링스>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각종 권위 있는 상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상은 르포 작품으로 분류하고 시상했더라. 음 르포로 볼 수도 있겠다.

<마이너 필링스>의 부제가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로 붙였다. 아마도 한국 출판사에서 번역서를 내면서 추가로 붙였나 보더라. 좀 식상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흑백 갈등이 심한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사실상 동아시아 한중일 계 미국인) 사람들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종종 불려 나가기 때문에 차별당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사실은 흑인보다 더 적나라한 차별을 받으며 힘들게 살고 있다-대강 이러한 내용이라고 부제가 알려준다고 예단하며 책을 펼쳤다.

웬걸.... 그런 단순함을 담지 않았다. 가장 로컬한 것이 가장 글로벌하다는 말과 통하는 면이 보였다. LA에서 태어난 40대의 한국계 미국인이 어린이와 청소년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과 예술가로 살아가는 인생 여정을 그렸지만 행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낙후성을 지적하는 예리한 철학과 첨단 정치학, 유튜브와 틱톡이 점거한 세상의 새로운 예술에 대해 꿈꾸고 있다.

읽는 이로서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포의 2세의 경험담에 공감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곧바로 작가의 ‘필링스’는 한반도 남쪽에서 한국전쟁 이후 태어나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나의 삶이 라이브방송처럼 생성됐다. 서로 조금은 다르겠지만 내 삶의 레이어와 캐시 박 홍 레이어를 겹쳤더니 절묘하게 어울리며 멋진 작품이 된다.

아래 내용을 절절하게 토해내는 건 미국에서 동아시아의 겉모습(백인은 동아시아인은 모두 중국인으로 인식한다)으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걸 잘 표현한다.

한(恨)은 가혹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국에 의해 지탱되었고 정치적으로 바로 세우지 못한 독재의 역사 때문에 쌓인 울분, 아쉬움, 수치심, 우울, 앙심의 혼합물이다. 한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로 대물림될 수도 있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마이너 필링스의 원천을 아래처럼 표현한 것도 공감한다.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그리고 마이너 필링스의 핵심을 ‘수치’로 던진 아래 글에 동감이다.

그것은 사회적 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또는 가해자—로서 점하는 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나는 개들이 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이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 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 몸은 껍데기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 화한다.


나의 한계이겠지만 위의 표현들은 머리로 이해하는데, 몸이 떨리는 파동의 겹침은 일어나지 않는다. 피부색과 생김새로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가 돼 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마침내 다음의 기술(記述)에서 무릎을 치는 공감이 생겼다.

2017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공정한 실력주의 사회라는 관념은 저소득층 흑인 및 갈색인 6학년 학생들 사이에서 자기 회의와 행동 장애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어느 교사가 말한 대로 “아이들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었다.


30년 넘어 살아온 세월이 <교사>의 정체성이다보니 “아이들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기”는 내가 해 온 작업이다.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서 선보인 것은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인 척하기” 화장(化粧) 기술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마이너가 아니길 간절하게 바라며 살아왔던가. <마이너 필링스>의 콘텐츠는 마이너 등급으로 취급당한 학생들을 만났던 대안학교의 경험들과 지금 당장 만나는 도농복합 지역의 어린 친구들이 휙휙 지나간다.

20년 전에 내가 기록한 말을 보면, “아이들은 삼성과 나이키, 아우디(왜 벤츠나 포르쉐가 아닐까 당시에 의아했다)에 굴복하지 아버지나 선생님, 그리고 법전에 고개 숙이지 않는다”고 썼다. 부모와 선생은 봉건적 권위라서 90년대 서태지 등장과 함께 진즉에 폐기됐고 법전은 텍스트의 최전선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20년 전에 이미 텍스트는 메이저 자리에서 내려왔다. 동시에 한반도 남쪽 아이들에게 까만 피부색이 마이너가 아니다. 비하의 신조어 ‘흑형’은 오히려 부러운 존재로 사용한다.

올드한 세상에 몸을 담근 나에게 MZ의 사고는 상당히 충격적이다. 분명히 현실 자본이나 상징 자본이 메이저 자리에 있고,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부류가 마이너에 있는 건 여전하지만 자본의 변형이 워낙 다양하여 어린 친구들은 부자/빈자의 카테고리로 메이저와 마이너로 선을 긋지 않는다.

캐시 박 홍 작가의 진단은 어지러운 내 머리를 정돈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바로 언어에 대한 작가의 혜안이다.

매키는 식민정복자의 영어에 “침입하여” 식민지 토착어로 새 말을 빚어냄으로써, 백인의 명사를 되찾아와 동사로 되돌려놓자고 촉구한다. 내가 영어를 타자화하는 방식은 영어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가 먼저 영어를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처럼 서로 먹고 먹히는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 장면에서 한 남자가 횟집에 들어가 산 낙지를 주문하는데, 통째로 나온 낙지가 접시 위에서 꿈틀거린다. 그는 그 낙지를 한꺼번에 입에 밀어 넣지만, 너무 커서 다 안 들어간다. 낙지의 다리가 그의 머리를 죄고 머리를 뒤덮어 기도가 막힌다. 결국 그는 졸도한다. 글이 잘 써지는 날에는 내가 바로 그 낙지가 된다.


통증은 없지만 고통 속에서 마이너 필링스의 늪에 허우적대는 어린 친구들이 언어(모국어를 말한다)가 아이들은 삼키기 전에 아이들이 먼저 언어를 삼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 아이들이 낙지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막는 낙지가 되도록 어찌 부채질할 것인가. 쉽지 않다. 말 표현부터 쉽지 않다.

나는 캐시 박 홍 작가의 예술론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예술은 이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잠시라도 꿈꾸는 일이다. 그렇지만 소셜미디어가 그런 비밀스러운 유토피아를 거의 즉시 뿌리 뽑아 표면에 드러내고 첨단기술 기업의 알고리즘이 예술과 시가 공유되는 영역을 감독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 감춰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꿈꾸게 한다는 표현이 마음에 쏙 든다. 예술 대신에 ‘저항’을 넣어도 된다. 작가는 저항에 대해서도 말했다.


2016년 대통령 선거 이후로, 나는 노는 것도 저항의 한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결국 성실의 패러다임이 우리를 옥죄는 세상에서 탈출하는 일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아.... <마냥 놀기만 하는 학교>를 하고 싶다. 하지만 기가 많이 죽었다. 내가 입만 산 지식인의 허위를 벗을 날이 있을까. 자신이 바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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