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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미러를 읽고

자본은 어떻게 세상을 세뇌하는가

by 박달나무

지아 톨렌티노(1988년 생), 노지양 역, 생각의힘, 2021.2 (원작은 2019년 출판)


1. 들어가는 글


“초등학교 때는 체조 선수였고 고등학교 때는 치어리더였으며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면서도 성적 우수자로 졸업생 대표 연설을 했다. 남부 명문 버지니아주립대학을 전액 장학금으로 다녔고 여학생 사교 클럽 회원이자 아카펠라 합창단이었고 졸업 후에 평화봉사단과 대학원을 거쳐 뉴욕으로 와 〈제제벨〉의 에디터가 된다. 인종적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아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을 듯한 필리핀계 아시안으로 깜찍하고 귀여운 외모에 청 미니스커트와 흰색 민소매 밖으론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드러나며 브루클린에서 살면서 건축가 남자친구의 재택근무 모습이나 잘생긴 반려견을 SNS에 올린다. 핼러윈에는 포카혼타스가 되어 핫한 파티에 가고, 친구 결혼식에서는 파스텔톤 드레스를 입은 들러리가 되고, 뮤직 페스티벌에서는 숏팬츠를 입고 손에 맥주병을 들고 리듬을 타고 있을 그녀가 쉽게 연상된다.”

번역자 노지양이 소개한 지아 톨레니노의 작가 소개문이다. 30대 초반의 미국 여성이 쓴 지금의 미국 사회 정치 문화 지형을 배경으로 작가의 주관적 페미니즘 관점을 서술한 에세이가 <트릭미러>이다. 지아 작가 데뷔작이라는데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성공한 책이었단다. 지아 작가는 매우 꼼꼼한 기억 관리가 있고(본인은 자주 까먹는다는 표현도 있지만) 상당히 광범위하고 깊은 독서 이력이 느껴졌다.

내가 <트릭미러>를 읽는 건 힘든 독서 노동이었다. 마돈나와 르윈스키 정도는 알겠는데, 최근 미국 TV에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도 모르겠거니와, 마돈나와 르윈스키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유명 정치인을 포함한 대중 스타의 디테일한 개인사나 루머, 스캔들을 모르고 읽기에 매끄럽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대중 스타를 내가 몰라서 읽기 힘들다고 말하기엔 부족함이 많다. 뭔가 내 생각을 풀어 말하지 못하겠기에 독후감을 쓰는 건 더욱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 느낌이랄까. 내가 왜 읽기도, 생각하기도, 쓰기는 더욱 더 힘들어하는지 명상을 하면서 더듬는다.

<트릭미러>는 그닥 콘텐츠로 날 사로잡지 못했지만 읽을수록 빠져들어간 계기는 ‘들어가는 말’에 이런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자기기만을 털어내는 방법이면서 그것을 내 눈 바로 앞에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뭔가 멋진 말이지만 한눈에 파악되는 말은 아니었다. 책을 열독하면 저 문구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서 ‘내 것’이 되고, 내가 좀 더 멋진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한 장 한 장 넘겼다. 작가에게는 ‘쓰기’지만 독자인 내게는 ‘읽기’가 자기기만을 털어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자기기만은 누구나 영원히 털어버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만으로 나이를 층층이 쌓아올린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종종 사는 게 고통스럽기 때문에 책장을 넘길수록 ‘털어버리기’ 갈망은 커졌다.

결론은 쉽지 않다, 털어버린다는 것이.

털어버리기를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이게 이번 독후감의 결론이다.


2. 페미니즘에 대한 혼란


<트릭미러>는 미국에 태어나서 자란 청년 여성이 진단하는 2010년 이후 미국의 정치 지형에서 전개된 페미니즘과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소비의 양상과 방향성 기술(記述)이다. 나는 방금 쓴 문장에서 기술(記述)과 서술(敍述)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했다. <트릭미러>는 작가의 서술(敍述)이 맞겠지만, 작가는 기술(記述)을 하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입장이 없는데 기술될 수 없다. 입장이 없이 정보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아 톨렌티노의 입장에서 현란한 문장 기술이 이어지지만 근본적으로 작가의 입장을 공유하지 못하는 한 책의 재미를 함께 하지 못한다. 내가 그렇다. 미국에서 태어난 자란 아시아계 고학력 청년 여성인 지아 톨렌티노의 입장을 공유하기는 어렵다.

이반 일리치가 <전문가 사회> 1장에서(일리치는 1장만 썼다) 이런 말을 털어놨다.


.....그때까지만 해도(80년 대 초기) 나는 예를 들면 인간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게 가능하다고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어느 여자가 어느 날 하버드에서 강의를 마친 뒤 나에게 딱 한 가지를 물었다. "일리치 교수님, 인간의 몸을 본 적이 있으세요?"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말이다.


인간의 몸이 현실에서 무엇인가. 인간의 몸은 실제로 없다. 관념이다. 일리치는 '인간의 몸'이 법 내지는 종교의 개념이라고 말했다. 몸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없고, 여자 또는 남자가 있는 것.

남과 여로 구분해서 생기는 모순과 억압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 묶었을 때 생기는 공허한 개념의 잔치도 있다. 원래 우리는 남 또는 여로 태어났고, 그냥 그런 것이고, 권력의 사회를 디자인하면서 남과 여의 성차별도 만들었고, 반대로 관념적인 “인간”을 언급하는 헛지식인들에 의해 남과 여를 지워서 생기는 이중 차별도 있다. 잘 살기 위해(웰빙이라는 거) 공부가 필요하긴 한데, 참으로 꼬이고도 꼬인 세상이라 쉽지 않다. 지식인의 죄도 크고, 지식인의 역할도 크다.

곧바로 내가 간여하는 분야와 연결됐다. '아동'이 있는가? '아동'의 몸이 있는가? '아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범주를 나타내는 낱말은 그 자체로 정치적 관념이다. '아동'은 없다. 철수가 있고, 영희가 있는 것이지. 똑같이 아동과 성인(아이와 어른)의 구분도 언급할 수 있다. 카테고리화는 매우 위험한 음모가 있지만, 카테고리를 지웠을 때 아동에게 가해지는 이중의 고통과 불이익도 있다.

남자인 나는 매개가 없다면 여자 인간을 영원히 알 수 없다. 방금 딸 자식이 “생리통 때문에 힘들어”라고 말했다. 나는 <생리> <통증> <힘들다(아프다)>로 딸이 발화한 음성정보를 코드화시키고 낱말과 내가 스키마한 개념을 연결시킨다음 내만의 해석을 하고 ‘알았다’고 느낀다. 내 느낌을 타인은 알 수 없다. 내 느낌에 옳다 그르다는 없다. 나는 여성의 생리통을 영원히 알 수 없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안다고 생각할 뿐.


여성들 대부분은 자신이 독자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한다.(3장 ‘언제나 최적화’ 중 p.95)


나는 정희진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고, 정희진 오프 강연을 찾아가서 들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은 정치학의 다른 이름이다. 정희진의 여성학은 계급투쟁의 한 갈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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