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치유력에 대하여
<걷기의 인문학>은 국내에 소개된 레베카 솔닛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저작이다. 읽고 난 후 한마디가 떠올랐다. “미국판 공포의 구라이구만” 백기완, 황석영, 방배추(동규)가 한국의 3대 구라로 회자되는 일화에서 떠올랐다. 실제로 에세이를 쓸 때 엄청난 정보 카드를 정리하여 옆에 두고 썼겠지만 마치 참고자료 없이 엉덩이로 쓴 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레베카와 걸으면 레베카의 끊임없는 스토리텔링 때문에 귀에서 피가 흘렀을 것이다. 엄청나게 많이 읽은 게 분명하다.
레베카 솔닛이 누굴까 궁금하여 검색했다. 유명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 공부도 했다. <걷기의 인문학>은 25년 전 레베카 나이 40에 썼다. 가장 글쓰기 왕성할 나이가 아닐까. 책을 읽기 전 표지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책날개 뒤편에 레베카 솔닛의 다른 작품 소개를 발견했다.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를 소개하면서 정희진의 추천글을 실었다.
제가 읽은 가장 구체적인 잠언이에요. 허공에 뜬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글은 노동하는 여성만이 쓸 수 있어요. 지성과 통찰은 약자가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읽기가 사는 고통을 덜어 준다는 말은 사실이에요. 외로움도, 죽고 싶은 마음도 진정시켜 줍니다. 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정희진)
와... 정희진의 간단한 소개글에 감전됐다. 지성과 통찰이 약자의 힘이라니! 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니! 정희진의 믿음을 나도 공유하게 된다. 즉각적으로 신영복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 삶, 그것이 노동자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약자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지성과 통찰이라면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넘어야 한다. 선을 넘자. 레베카 솔닛은 선을 걸어서 넘자고 말한다. 걷는 것만이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레베카의 목소리는 걷기보다는 넘기에 있다.
인생을 만드는 것은 공식적 사건들 사이에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고,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계산 불가능한 일들이다. 보행은 지난 200년간 예측 불가능한 일들, 계산 불가능한 일들을 탐구하는 최상의 방법이 되어주었는데, 이제 이 방법이 여러 전선에서 위협받고 있다. (p.27)
<걷기의 인문학>의 원제는 <방랑자들; 걷기의 한 역사>이다. 한국의 초판 번역서는 <걷기의 역사>(민음사)로 나왔다. 그 후 2017년에 <걷기의 인문학>으로 제목을 고쳐서 반비출판사에서 냈다. 원서나 번역 초판본이나 복간본 모두 같은 표지 디자인을 쓰고 있다. 사실 난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샀다. 꽤 여러 해 전에 구매했고, 소장 책 대부분을 버렸지만 아직도 내 책꽂이에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녀석 중 사이에 있다. 다시 읽는데 마치 처음 읽는 느낌이다. 엄청난 구라답게 레베카 자신의 경험과 풍부한 독서 이력, 심혈을 기울인 자료 조사가 뒤엉켜 현란한 텍스트 드리블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은 건 드리블 경로를 따라가지 못해 길을 잃었다. 다시 읽으니 지워진 길이 되살아났다.
내가 <걷기의 인문학>을 손에 잡은 건 당시 ‘걷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 (2014, 효형출판)을 소개받았다.
<나는 걷는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설립한 "쇠이유"에 급관심이 생겨 <쇠이유,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을 사서 읽었다. 176쪽에 있는 아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쇠이유는 여행에 대한 니콜라 부비에의 다음과 같은 정의를 채택했다.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이 당신을 만들거나 해체한다.”
여행, 특히 걷기가 청소년의 인격 형성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아이가 자신의 일상 세계를 벗어나서 걸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힘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2015.9. 작성)
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걷기가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쇠이유처럼 3달 동안 2천 km을 걷는 건 무리지만 수백 km를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도전했다. 당시 내가 진행하는 대안학교 어린이들을 데리고 걸을 생각에 학부모에게 편지 형식의 통신문을 보냈다. 일상을 벗어나 걸어야 한다는 베르나르 올리비에 조언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항공편 이용
우리는 러시아항공을 이용해서 인천공항-모스크바-마드리드 루트로 날아갑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수속과 대기를 위해 여러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넓은 공항에서 아동의 개인행동은 자칫 이산가족을 만들기 때문에 인솔자와 아이들 모두 긴장해야 합니다.
모스크바까지 8시간 비행을 합니다.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비행기 안에서 행동의 제약을 잘 견뎌야 합니다. 운이 좋으면 모스크바에서 2시간만에 다음 비행기를 타지만 운이 나쁘면 14시간을 기다렸다가 마드리드 행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마드리드 직항기는 두 배의 요금을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모스크바나 프랑크푸르트, 헬싱키 등을 경유해야하는 경험을 합니다. 다시 마드리드까지 5시간을 날아가야 합니다. 귀국할 때도 같은 경로를 밟아야 합니다.
인솔자로서 걱정되는 일이지만 극복했을 때 얻는 메리트가 상당하다고 봤습니다. 견뎌야 하는 일이지만 위험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기간 걷기
여행의 중심은 걷기에 있습니다. 하루 평균 20km를 걸어야하기 때문에 날씨나 길 컨디션이 좋을 때 25km까지 걸어야 합니다. 작년 진안고원길 4박5일을 그 정도씩 걸었습니다. 저학년 두 아이도 걷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에 전체 450km 완주가 어려운 목표는 아닙니다. 다만 25일을 날마다 6~7시간씩 걷는다(쉬는 시간 제외)는 반복적 행위를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물집이나 발목을 삐는 정도 부상이 있을 때, 육체적 피곤이 쌓일 때 아이들은 어떻게 자기 컨트롤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알 수 없음" 때문에 걷기 여행은 소정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걷는 주체인 아이들 스스로 미리 예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어린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측가능한 상황에 놓일 때 사람은 동력을 잃고 자기를 해체시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맞닥뜨렸을 때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재점검하고 긴장하며 점화불꽃을 가동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에 대한 책임
아이들은 알베르게(게스트하우스)에 오후 4시 쯤 들어갑니다. 들어가자마자 씻고 자기가 입은 옷을 빨아야 합니다. 샤워와 빨래를 늦추면 빨래가 마르지 않아 문제가 됩니다. 반드시 알베르게 도착 즉시 두 가지를 수행해야합니다. 저학년의 경우 인솔자가 도와줄 수 있지만 고학년은 자신이 해결해야합니다.
얇고 가벼운 침낭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다닙니다. 아이들은 침낭을 꺼낼 수는 있지만 개서 커버에 넣는 것을 못합니다. 꼼꼼하게 개지 않으면 부피가 커져서 커버에 들어가질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 일을 교사가 해줬습니다. 이제 침낭을 펴고 개서 껍질에 넣는 것을 각자 책임져야 합니다. 출발 전 학교에서 반복적으로 연습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이런 행동은 평소에 하던 건 아닙니다. 걷기여행이 주는 피할 수 없는 훈련입니다.
또한 매일 저녁 배낭을 열고 매일 아침 배낭을 싸야 합니다. 지금까지 아이들 수준에서는 이것도 도전입니다. 어른도 서툰 사람이 있는데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좋은 훈련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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