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가스라이팅은 자아가 실재한다고 속삭이는 것
1.
여주역에서 아침 일찍 서울 가는 전철은 승객이 아주 적다.* 최근에 구매한 <최소한의 한국사>를 꺼내 읽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읽어줄 역사책을 고르다가, 출판사 책소개 보고 선택한 책으로, 일종의 한 권짜리 <이야기 한국사>
10년 전에 내게 온 초등4학년 아이는 우리가 북한이고, 김정은 정권은 남한이라고 우긴 적이 있다. 단순한 착각/혼란이지만 TV뉴스 전혀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으며, 어른과 대화 조차 없다면 남북한 위치가 뒤집어지는 일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냥 읽어주면 최소한의 <한국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워낙 논란이 많은 한국사에서 교과서에서 다루는 역사 지식알갱이들을 모아모아 놓았다.
그래도 수천 년 역사에서 어떤 정치적 결단이 민복(民福)에 기여하는지, 또는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는지 저자의 시각을 조금은 넣었다.
과연 우리 아이들이 읽어주면 들어줄까….
(* 재작년에 나는 서울에 사는 초4와 초6(서로 다른 가정) 남아를 여주집에서 주중에 데리고 살았다. 월요일 아침에 초4 남아를 데리러 가는 길이다.)
2.
이제 아이들이 먼저 무이숲카페에 가자고 조른다. 어쩌다 한번 가면 부담없지만, 자주 가면 카페에서 지출이 크다.
“그래! 가자”
오늘 같은 날, 카페의 시원함은 참을 수 없지.
카페에서 작은아이가 행복한 표정이다.
이유는,
14개월 아기와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알고 봤더니 낮에는 무이숲카페가 돌쟁이 엄마들의 성지였다.
작은아이는 14개월 어린 동생에게 진심이다. 손잡고 여기저기(무이숲카페는 아주 큰 공간)다니고, 그림책도 보여주고, 세상의 이치에 대해 정성껏 설명해준다.
아기 엄마가 따라다니며 작은아이와 자신의 딸을 지켜본다. 아기 엄마는 작은아이가 매우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아기와 잘 놀아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특히 아기가 옹알이처럼 말하는데, 마치 “오빠오빠” 말하는 것 같다.
작은아이는 아기가 자기를 잘 따르고(아기가 먼저 손잡고 여기가자 저기가자 적극적이다) 아기 엄마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상황에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다.
그리고 드디어 예상했던 발언이 나왔다.
“선생님… 나 저 이모집에 가서 살고 싶어요”
“아니… 왜?”
“이모는 친절하잖아. 선생님은 날 위협하고 야단만 치잖아. 그러니 날 저 이모집에 보내줘요”
자기가 말해놓고 좀 민망해하는 눈치긴 했다. 그래서 곧 수정발언한다.
“아니, 이모집에 가서 살 수는 없고….아기랑 더 놀아야해서 오늘 태권도 안 갈래요”
카페가 태권도도장 근처에 있다.
…..
…..
결국 태권도에 5분 늦게 들어갔다. 지각은 한달 반 동안 처음있는 일이다.
3.
작은아이가 태어나서 딱 10년이 됐다. 10년 밖에 안 살았지만, 한편으론 10년이나 세상의 룰에 노출됐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아이는 일정 구간이 지워진듯한 모습이다. 이런 경우가 흔하다.(정말 흔하다) 그런 흔한 일이 <특별>한 경우가 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4.
열흘 전에 올해의 어록이라고 하면서(페친 포스팅에서 본 것),
“스스로에게 자아가 실재한다고 속삭이는 게 가스라이팅”을 소개했다.
작은아이의 고정된 자아가 있는 게 아니다. 잠깐만 상상해봐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이덴티티가 한결 같다. 평생 변하지 않는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변해야 인간이고, 어릴수록 변화무쌍하게 그리고 빠르게 조변석개가 당연하다.
무이숲카페에서 14개월 아기에게 1시간반 이상 훌륭한 오빠/가디언/보디가드/선생/멘토 역할을 한 작은아이의 모습은 가짜인가…
훌륭한 모습(A)와 어린 폭군(B) 귀여운 떼쟁이(C) 모두 작은아이다.
A, B, C의 작은아이는 작은아이의 피부를 경계로 내부에(즉 뇌를 포함한 신체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과 만나서 <생성된> 화학적 반응의 결과물로 이해해야 한다.
5.
결과물은,
이미 아이가 소유하고 있던 “고유의 아이덴티티/캐릭터/심성/역량(capability)”이 아니다!
<줄탁동시>처럼 아이의 <의지>와 아이를 둘러싼 <상황>이 만나는 순간에 반응 결과물 형태로 아이의 아이덴티티가 나타난다.
<줄(啐);병아리가 내는 소리>이나 <탁(啄);어미닭이 알을 쪼는 행위> 한가지만으로 목숨이 태어나지 않는다. 줄탁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러면 결과물로 병아리 생명이 태어난다.
이걸 동아시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까맣게 잊었고;국어시험에나 나오는 옛날 정서라고 생각) 20세기 후반기에 북유럽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제도화했다.
그걸 <상황학습>이라 이름 붙였다.
6.
오은영의 말은 우리의 상식이 돼버린 <모든 게 뇌의 작동>이라는 헛된 믿음에서 기인한다.
장애가 있다/없다의 차원이 아니라 있다와 없다를 가르는 경계가 아무 의미없다고 생각한다. 아이(어른도 마찬가지)에게 그런 경계선이 있을리 없다. 그저 <전문가>가 ‘획’ 그었을 뿐.
나는 아이를 그런 경계를 거두고 바라보고 대한다.(못된 관성이 남아있기는 하다)
7.
아내가 많이 우울하다.
서이초 젊은 여교사의 교실에서 자살*과 서울 목동(그렇게 들었다)의 여교사가 6학년 아이에게 폭행을 당하고 입원했다는 뉴스 때문이다. 특히 목숨을 끊은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도 하루종일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런 비극을 막아보겠다고 뛰어다닌 짧지 않은 세월이 있었기에 내 책임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다.
(*2년 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8.
학교가 있고, 교실이 있고, 국가기준 교육과정이 있고,
그런 것은 <절대> 지켜야 하고,
아이들은 점점 삐뚤어지고,
더 많은 아이들이 ADHD 진단을 받고….
이런 인식은 위에서 말한 <상황학습>과 대각선 반대 편에 있다.
방학 때 스웨덴에 견학갈 일이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를 머리에 이고 살길래 비극이 끊이지 않는지 고민해야 한다.
9.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스라이팅은
스스로에게 '자아'라는 것이 실재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 아닐까.
Extra
작은 아이(초4 남아) 경우,
주요한 원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또래에 비해 체격이 (상대적으로) 작았다. 키가 작고 날씬하니까 주변 아이들이 무시한다. 몸통이 부딪히면 밀린다. 달리기 활동에서 뒤처진다. 뜀틀 수업에 곤란함이 있다.
반면에 아이는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손끝이 야무지다. (이게 문제의 발생.... 아둔하거나 감각이 떨어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높은 수준의 리터러시와 비상한 기억력, 창의적인 종이접기와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작은 아이는 학교 시스템과 불화하는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작은 체격이 불이익을 받고, 나아가 조롱거리가 되는 건 소돔과 고모라 진입 시기의 징후다. 과거에 150cm 고1 남학생이 나에게 와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진학한 적이 있다. 당시 고1학생은 천재적이진 않았다. 매우 창의적이긴 했고, 학교에서 받은 조롱과 배제로 상처가 컸다. 뭐 지금이야 IT 기업에서 서로 데려가려는 인재로 통하지만, 당시 공교육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안정감은 없을 수 있다.
나는 작은 체격이 작은 아이 아이덴티티를 형성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작은 체격의 아이가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잃었다면 내게 상담을 요청하는 건 효용성이 높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