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자를 위한 연가
※2011년 중고생 6명을 데리고 여수의 돌산도에서 석 달 가까이 합숙한 기록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친구들은 6년이 지난 지금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당시에는 자기컨트롤이 어려워서 부모님이나 사회적 제도에서 벗어난 환경을 마련하고자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고 여수로 떠났던 것입니다.
월요일에 내려와서 벌써 금요일, 아니 날짜 바뀌어 토요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시간의 상대성이라니, 헐~
아이들이나 선생이나 적응하느라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오늘(22일;금)에야 인터넷 설치하고 배달 과정에서 망가진 데스크탑도 오전에 수리마치고 컴퓨터를 교실에 배치했습니다. 이제야 세상과 소통이 되는군요.
(어떤 버전으로 일지를 쓸까 고민됩니다. 대국민오픈버전도 있고, 개인일기버전, 학부모위로용버전, 학생격려용버전 등이 있을 수 있는데, 글쎄요~ 아마도 뒤섞일 듯. 개요없이 손가락가는대로 풀어봅니다. 다소간 감정선의 등락이 예상됩니다)
4월18일(월)
여타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김샘과 송샘의 배웅을 받으며 11시10분차로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수 고고씽~ 오후4시 도착. 마중 나오시는 수련원 원감님과 약속은 5시10분 경. 가져온 짐이 엄청나서 하차 지점에서 꼼짝도 못하는 형편. 어쩔가 하다가 학생들에게 미션부여.
"얘들아, 자알 의논해서 먹고 살 것들을 쇼핑해와라. 저기 보이는 E마트에 가서"
20만원을 건넸다. 과연 어떤 품목들을 사가지고 올 것인가? 아이들의 자세와 이번 장기캠프에 대한 이해의 바로미터가 이 친구들 장바구니에 고스란히 담길 것이라 생각했다. 기대 반 우려 반. 해서 멀어진 아이들 뒷꼭지에 "쌀도 사고 카레 해먹을 거리들 같은거~"라고 소리쳐놓고 기다렸다.
50분쯤 지나서 두 명씩 짝을 지어 나타난다. 천 원 모자란 20만원을 다쓰고 왔단다.
쌀 20Kg과 캐나다산 삼겹살 5근을 비롯하여 3개 비닐봉지에 뭔가를 담아가지고 왔다.
원감님 도움으로 우리가 지낼 제일수련원에 도착. 6시가 살짝 넘은 시간. 숙소에 각자 짐을 내려놓으라고 하고 바로 주방으로 직행. 저녁을 먹여야하는 임무를 잘 알고 있는지라~
단 한 끼 해먹을 것이 없다. 흑흑. 양파 소망 한 자루, 파 한 단, 올리브기름 750ml, 참기름 300ml, 우유 1000ml, 시리얼 한 통, 스팸2통(2개 붙어있는 것), 3분짜장 한 개, 고추참치 4캔(4캔 덕용포장), 콜라 1페트병, 과자 다수(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신라면 10개, 짜파게티 5개, 계란 두 꾸러미(풀무원 제일 비싼 달걀), 두부 두 모(만두용 큰 사이즈), 맛타리 버섯 1포장, 고추장, 쌈장, 된장 각 한 통, 상추 500그램 등을 꺼냈다. 당장 뭘 먹지?? 밥을 안치고 서울에서 가져온 김치에 삼겹살을 넣고 김치찌개를 끊였다. 잘 먹는다.
아이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 낯선 환경에, 여러 달을 머물 생각에 심란한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다툼이 이어지나보다라고. 이마트에서는 쇼핑 목록으로 영익이와 종찬이가 부딪쳤단다. 현승이도 조짐이 좋지 않다. 근호도 어디 빠질 녀석인가. 그건 나만의 오해(긴장할 것이다)라는 것을 수요일쯤 알게 된다. 얘들이 남자 청소년인 것을 깜박했나보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옆사람과 어떻게든 다툴 것-이 친구들 뇌에 프로그래밍된 사항이다. 하도 시끄럽게 부딪치니까 희수와 지훈이는 비껴선다. 그나마 다행.
보일러 빵빵하게 돌려 따뜻하게 재운다. 장시간 탑승이 힘들었는지 금방 잠든다.
'이제 여기서 살아남아야한다!!! 그래 이기는 자가 사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지. 어떻든 죽지 말고 살아남자. 중간에 돌아가는 것은 죽는 거야.'
심란교향곡의 서곡은 단순하고 짧았다.
아참, 쇼핑 결과에 대하여. 이 친구들은 상황파악×, 상호협력×, 생활설계능력×, 엄마랑 마트 가기 경험 별로 없음이 드러났다.
한 가지 더. 저녁 먹고 지훈이가 설거지를 시작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믿어지지 않았지만) 집에서 자주 한단다. 칭찬을 마구 날렸다. 고무장갑을 끼고 룰루랄라 설거지를 한다. 아이들 특유의 설거지 상황-설거지 세제 왕창써서 거품놀이, 느린 진행, 아무리 큰 개수대도 작게 만들어 버리기-이 전개됐지만, 그런게 문젠가. 기특한 지훈이. 흑~ 결론은 지훈이가 들어가고 다시 그릇을 헹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밤은 태초의 우주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