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매일 연재 칼럼 > 스마트세상
(이미지출처: 그림책박물관 > 해와 바람 이솝 우화 뒷이야기)
얼마 전 지역 공무원 대상 특강에서 있었던 일이다. 언제나처럼 강의에 온통 열정을 쏟아 부은 후 방전된 상태로 걸어 나오는데, 수강생 한분이 본인 담당 업무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심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마을 공동체 혁신 사업 건에 대해 스마트시티로 연계 가능한 부분이 있을지 의견을 듣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강의 중에도 얘기한 스마트시티의 특성을 다시 설명 드리며, 일정이 너무 촉박해 보이니 이번에는 당초 계획대로 진행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거듭 부탁하시는 통에 시간을 내어 도움을 좀 드리기로 했다.
준비된 내용을 받아서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꼼꼼히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목표로 잡은 아이템 은 스마트 기술의 활용과는 거리가 멀었고, 심사를 며칠 앞둔 상황에 방향을 바꾸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당장은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지만, 향후에라도 참조하시라는 뜻으로, 우리가 가진 솔루션 목록을 보내드렸다.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에서 도움에 대한 감사의 인사나 후일을 기약하는 말씀을 기대한 내 기대와는 달리, 목록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고 대부분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부정적 의견만이 돌아왔다.
반응이 예상된 일이었지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스마트시티는 그렇게 카탈로그를 넘겨보며 남이 만들어 둔 기성품을 쇼핑하듯이 쉽게 단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와 혁신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가진 시민과 전문가가 팀을 이루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가야 하는 혁신활동 그 자체라는 점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해졌다. 다음 강의에서는 이점을 한 번 더 강조해야겠다고 마음먹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바로 스마트시티를 비롯한 첨단 기술 기반 산업의 본질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어떤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의 잠재력만을 보고 먼저 받아들이거나 투자를 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현재의 방식을 최대한 유지하기를 원하고 따라서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는 소극적, 방어적이 된다. 첨단 기술 기반의 창업 기업들을 ‘벤처’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신기술의 등장 초기에는 그 산업적 파괴력을 예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런 경우의 선제적 실행이나 투자는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다.
모험에 따른 실패의 가능성 때문에, 먼저 움직이는 것이 항상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설익은 첨단기술의 실패사례는 세계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한때 화려하게 등장하여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사라진 개인휴대용단말기(PDA), 넷북, 3D TV의 실패와 몰락은 겨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실제로 첨단제품의 시장 성숙도 곡선 상에는 소위 얼리아답터의 성공 다음에 따라오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예상이 적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먼저 움직인 모험적 성향의 사람들은 그 혜택을 먼저 누리고 많은 수익을 올린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다시 짜며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후발 주자들과의 격차를 더 벌여 간다. 한편 그 가치가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가 치밀하게 짜 놓은 판과 복잡한 규칙에 맞추어 따라 가느라, 그 혜택을 누리거나 수익을 얻을 기회도 현저히 줄어든다.
변화의 바람은 언제나 거세고 차갑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 앞에서 이솝 우화 속 나그네처럼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방어하려는 본능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금세 바람이 그치고 약속한 듯 따뜻한 해가 비치는 것은 동화 속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옷깃만 부여잡고 해가 비칠 날만 기다리는 것은 변화무쌍한 4.0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잘 살펴서, 필요하다면 돌아서서 그 바람을 이용할 줄도 아는 현명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등록일 2019.05.14 20:17 게재일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