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lon May 29. 2020

우주 아이돌 뮤직비디오 작전 (上)

국내 뮤직 트렌드

"승리호"의 개봉과 "SF8"의 방영을 앞둔 시점에서 한국의 SF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선입견이나 심한 호들갑을 늘어놓는 것은 너무 새삼스럽다. 장편 블록버스터 영화와 지상파 단편 드라마 앤솔로지인 이 두 작품은 한국에서 SF 영상물의 입지가 소설이나 만화, 또 웹소설과 웹툰처럼 오랜 시간 동안 탄탄해진 결과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비약을 좀 해보자면, 아이돌 팝의 뮤직비디오도 "아이돌 팝의 뮤직비디오"라는 바로 그 한계를 바탕으로 여러 SF적 요소들을 그 영상에 차용해왔다. 완결된 서사나 자세한 설정보다는 곡 자체를 비롯해 인상적인 퍼포먼스나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주로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제약 속에서 SF적인 이야기나 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담아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겠지만, 그 제한 덕에 이를 창의적으로 이끌어낼 여지를 마련되기도 한다. 아이돌 팝 뮤직비디오에서의 SF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뮤직비디오 내적으로 "과학"적이거나 SF적인 기술, 혹은 현상에 대한 상상력이 나타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익숙한 기호와 코드가 등장하는지를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아 두 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했다.


글ㅣ나원영(웹진웨이브 에디터)


#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세계의 케이팝 저항군


SF는 가장 사소하고 개인적인 측면부터 방대하고 이론적인 규모까지 다양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K-Pop 뮤직비디오는 특정한 내러티브나 콘셉트, 주제 등을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매체이기에, 따라서 SF가 아이돌 팝에서 활용되는 방식 중 가장 알기 쉽게 제시되는 쪽은 거대한 세계를 설정해 멤버들을 등장인물처럼 삽입해 보여주는 경우다.

이 "거대한 세계" 중에서도 특별히 묶어볼 수 있는 케이스는 어두운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멤버들이 디스토피아의 저항군처럼 등장하는 경우다. 아마도 가장 야심찬 사례 중 하나일 티아라의 'Day by Day'와 'Sexy Love'를 살펴보자. "파괴된 세상에 동물보다 더 동물처럼 변해버린 인간들"에 대한 무거운 내레이션을 깔며 2부작으로 이어지는 뮤직비디오는 황폐해진 2333년의 미래도시에서 서로 충돌하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만, 인물들이 다양한 위치로 등장하는 이 복수극에서 2333년이라는 연도는 단순히 폐허가 된 "미래도시"를 제시하기 위해 쓰일 뿐, 그보다는 장검이 난무하는 멤버들의 액션이 더 강조되는 편이다.

한편 콘셉트가 확실하지 않은 아포칼립스 미래 도시보단 사이버펑크를 대거 활용해 분위기와 캐릭터성을 만들어낸 경우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NCT 127이 로케이션으로 삼은 서울의 거리에 "레트로한 사이버펑크"의 특징들을 더해 편집한 'Regular'가 가장 느슨한 경우라 하면, AleXa가 'Bomb'와 'Do or Die'로 이어지는 활동에서 이 특징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보랏빛 네온이 가득한 뒷골목에 버려진 안드로이드로 추정되는 AleXa가 깨어나 사이버펑크적인 미래 도시를 떠돌아다니고, 이후에는 다른 기괴한 기계 인간들과 맞서며 "왜 나를 이곳에 불러왔는지"를 찾아다니는지가 비디오의 주된 이야기다. 둔탁하고 빠른 트랩을 바탕으로 나타나는 온갖 홀로그램과 기계 장치들이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AleXa는 그 속에서 좀 더 탄탄하게 이 이야기를 이어갈 가능성을 보여준다.


T-ARA 'Day by Day'

T-ARA 'Sexy Love'

AleXa 'Bomb'

AleXa 'Do ro Die'

NCT 127 'Regular'


물론 아이돌 팝 뮤직비디오에서 나타나는 사이버펑크 미래 도시의 저항군 이야기에 있어 가장 상징적인 비디오는 역시 2NE1의 'Come Back Home'이다. 2333년이란 연도만 툭 던져놓은 'Day by Day'나 한 인물에만 집중하는 'Bomb'와는 조금 다르게, 'Come Back Home'은 2NE1의 이전 비디오들에 종종 나타났던 번쩍거리는 조형물들이나 캠피(campy)한 미래 세계와도 잘 어울리는 의상 등 이미 익숙해진 2NE1만의 고유함으로 사이버펑크 세계를 꾸민다. 디스토피아가 된 미래 속 홀로그램 고글이나 실험 표본이 잠든 실험실을 보여주는 비디오는 음모를 꾸미는 멤버들과 함께 강렬한 후렴구의 드롭을 신호탄으로 자연스럽게 "VIRTUAL PARADISE"로 진입한다. 비디오의 후반부, 접속된 가상 세계에서 화염병과 사제폭탄, 조명탄을 든 멤버들이 전진하고 때려 부수는 모습은 꽤나 SF적인 동시에 어떻게 보자면 2NE1가 쌓아 올린 반항적인 이미지에도 가장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편, 몇십 년 간 과도하게 사용된 사이버펑크의 이미지에선 살짝 벗어난 채 디스토피아 사회 속 저항군을 보여주는 온앤오프의 'Why'와 SF9의 'RPM'도 있다. 'Why'의 경우 글리치가 넘쳐나는 세계 속 멤버들의 범죄와 첩보, 또 (지극히 클리셰적으로 묘사된) "해킹"을 부지런히 보여준다. 특히 후반부에 허공에 뜬 채로 번쩍이며 무언가를 쏘아대는 정육면체 기계 장치를 비롯해 여러 확연한 이미지들을 매 초마다 집어넣는 것으로도 'Why'는 충분히 인상적인 SF 비디오가 된다. SF9의 경우에는 세계의 규모에 있어선 온앤오프보다 작을지 몰라도, 원색의 빛을 훨씬 강렬하게 내뿜는 네온사인과 홀로그램, 레이저 효과들을 "미래도시" 대신 여러 장비와 의상에 적용해 나름의 "미래기술"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두 곡의 웅장한 신스음은 각자가 구현한 변주된 사이버펑크 미래 세계의 분위기를 더 키워주면서 영상을 뒷받침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 비디오들을 어떠한 "저항문화"에 곧장 연결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강한 이미지나 분위기, 혹은 저항의 메시지를 각자의 미래 속에서 분투하는 멤버들의 모습으로 전달해보려는 시도는 흥미롭다. 또한 적어도 K-Pop 특유의 볼거리가 충만한 세계는 이들 비디오 속에서 모두 확실하게 드러난다. 조금 진부하거나 낡은 감이 없진 않겠지만, 사이버펑크를 위시로 한 SF 하위 장르의 변주나 저항군이라는 콘셉트는 뮤직비디오의 이야기를 꾸미는 것에 있어서 담대하고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2NE1 'Come Back Home'

ONF 'Why'

SF9 'RPM'


# 안드로이드와 외계인,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

앞선 영상들이 비디오에서의 세계나 배경과 연결 지을만한 요소를 SF에서 가져왔다면, 아이돌 자체에 활용하기 위해서 차용해온 SF적 요소도 있다. 이는 종종 아이돌 멤버의 신체나 안무, 의상 등을 통해 이들을 어떤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로 탈바꿈시키거나, 아니면 외계인이나 초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닌" 존재로써 등장시키는 식으로 나타났다. 재미있게도 티아라의 'Sexy Love', 그중에서도 "로봇 댄스" 버전 비디오가 여기서 다시 적절한 예시가 된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바코드가 기입된 네모난 통 속에 멤버들이 정지된 채로 서 있는 모습을 비춘 다음, 그들이 의식을 갖고 케이스 바깥으로 나온 다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가끔씩 "로봇 춤"에 가까울 팝핀이 들어간 안무를 시작한다.

사실 "안드로이드로서의 아이돌 멤버"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여러 뮤직비디오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플러그를 끼우자 "Wake Up"이라는 가사와 함께 일어나 춤추기 시작하는 샤이니의 'Everybody', 여러 기계 장치에 둘러싸인 채 멤버를 옭아매는 와이어를 보여주는 비스트의 'SHOCK'의 첫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남녀공학의 'Too Late'는 공중을 떠다니는 하얀 구형 기계들에 내장된 카메라의 시점을 안드로이드에 달린 HUD로 연결해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NCT 127의 'Superhuman'은 제목 그대로 "슈퍼휴먼"인 멤버들을 주로 점멸하는 기하학적인 글리치 효과를 통해 표현했다.

한편, 이달의 소녀 1/3의 '지금, 좋아해'는 종종 마주칠 수 있는 학원물을 배경으로 하지만, 목덜미에 센서가 달려 있고 한쪽 눈에서 파란빛이 나오며, 코드를 연결했을 때에 배터리가 "충전 중"이라는 메시지를 띄우는 비비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비비가 비디오나 세계관 속에서 안드로이드라는 설정을 삽입한다.

이들보다 더욱 직접적인 사례는 SF적인 이미지와 코드가 넘쳐나는 빅스의 'Error'다. 특별 출연한 허영지와 빅스 멤버들은 'Error' 속에서 얼굴의 분장과 더불어 온갖 부속품들이 드러난 채 합성되거나 반파된 기계 신체를 보여주며, 심지어 마지막에는 "기계 심장"까지 드러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까지 200년은 거뜬히 거슬러 올라갈 인조인간의 제작이나 죽은 연인을 본뜬 안드로이드에게 기억을 주입하는 스토리는 해당 클리셰를 "(신파적인 사랑을 담은) 뮤직비디오"란 형식에 맞게 활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연인을 잃는 비디오는 언제나 가요의 단골 소재기도 했고, 이것을 SF적으로 변주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테니 말이다.


빅스 'Error'

이달의 소녀 1/3 '지금, 좋아해'

남녀공학 'Too Late'

샤이니 'Everybody'

비스트 'SHOCK'

NCT 127 'Superhuman'


지금까지 다뤄온 거의 모든 비디오들에서 SF는 어두운 디스토피아 세계나 기본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안드로이드를 다루며 상대적으로 훨씬 진지하거나 무거운 해석으로 접근했다. 이와 결부되는 음악도 강하고 둔중한 베이스음이나 여러 금속들이 맞부딪힐 때의 날카롭고 쨍한 소리들을 여러 차례 사용했고, 이 모든 걸 포함하는 콘셉트도 마찬가지로 강렬한 이미지들을 강조해왔고 말이다. 다만, 이러한 SF적인 세계나 존재들을 무조건 그런 식으로 다룰 필요나 이유는 없다. 도리어 "인간이 아닌 존재"나 "억압적인 미래 세계" 같은 바로 그 설정을 한 번 역전시켜 가볍고 유쾌한 접근으로도 충분히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평행우주나 초능력, "엑소 플래닛" 등 느슨하게 SF적일 코드를 세계관과 비디오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활용해온 EXO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그중에 확실하게 SF라 할 수 있을 뮤직비디오로는 'Power'가 있다. 진지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던 'MAMA'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어두운 편이었던 이전 비디오들을 메타적인 자학과 함께 뒤집으며 시작되는 'Power'는 지금까지 소개한 대부분의 비디오들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띤다. 외계 행성을 배경으로 EXO 멤버들이 오래된 SF 영화에 나올 법한 거대한 깡통 로봇에 레이저 총으로 대적하는 나름의 "스페이스 오페라"는 카툰에 가까운 쾌활한 분위기와 이에 맞는 밝은 톤의 노래 덕에 유쾌하고 코믹한 공기가 감돌면서 기존 세계관의 단서들도 몇몇 드러낸다.

원더걸스의 '2 Different Tears'와 TWICE의 'SIGNAL'은 JYP 엔터테인먼트 역시 SF와 코미디를 결합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두 비디오의 공통점은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없이 그저 소재 정도로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점일 텐데, 먼저 외계 생명체를 생포하라는 (사장님의) 영상 메시지를 받은 멤버들의 분투를 그린 '2 Different Tears'는 오래된 B급 외계인 영화 같은 분장과 더불어 아프로 가발에 은박 나팔바지를 입은 댄서들의 코믹함을 전면적으로 내세운다. 상당히 단순한 편인 외계인과 UFO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나온 god의 '관찰'로부터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2 Different Tears'에서 7년이 지난 뒤 나온 트와이스의 'SIGNAL'에는 CG로 대체된 무표정의 퍼런 외계인이 등장한다. 뮤직비디오는 'TT'나 'Cheer Up'에서 각자에게 특징적인 이미지를 부여한 것처럼 트와이스의 멤버들에게 (나연의 <맨 인 블랙> 패러디와 더불어) 각기 다른 초능력을 더해준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대한 UFO로 빨려 들어가는 외계인과 트와이스가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다"는 설정은 그때까지 비디오에서 이어진 장난스러움에 나름의 반전을 더하기도 한다.


EXO 'Power'

원더걸스 '2 Different Tears'

트와이스 'SIGNAL'


진지한 세계관 구축이건 단순한 재미 건 간에, "나"와는 다른 존재로 아이돌 멤버들을 상정하고 이들에게 미지의 매력을 담아 넣는 것은 자주 볼 순 없다 하더라도 여러모로 전략적이다. "낯선 매력"을 심어두는 것은 단순히 뮤직비디오나 콘셉트 안에서만이 아니라 팬들이 아이돌과 맺는 관계의 기본적인 출입구를 위한 고유한 이미지와 서사를 구축할 때에도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SF적 요소들은 이제는 일상화된 세계관이나 떡밥처럼 복잡한 만큼 내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세계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재료이자, 바로 그 세계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는 디테일한 여지로 기능한다. 2333년의 디스토피아에서 칼싸움을 하거나, 사이버펑크 가상 세계의 저항군이 되어 맞서거나, 반 친구가 안드로이드라든가, 알고 보니 우리 모두 외계인이었다 하는 이야기, 그리고 다음 회차에 소개할 비디오들에서의 SF적 소재들은 아이돌과 팬에게 다양하게 주어진 내러티브를 색다르게 활용하는 방식들이다.


(글의 제목은 손지상의 소설 [우주 아이돌 배달 작전]에서 차용)




매거진의 이전글 한 눈에 보는 5월 넷째 주 빌보드 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