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lon Jun 26. 2020

우주 아이돌 뮤직비디오 작전 (下)

국내 뮤직 트렌드

지난번 "우주 아이돌 뮤직비디오 작전" 상편에서 다뤘던 뮤직비디오들은 특정한 SF 요소들이 확연하게 눈에 보이는 영상들이었다. 그렇지만 설사 분류하기 조금 애매할지라도 여전히 SF적 요소를 확실하게 찾을 수 있는 비디오들도 물론 있다. 이번에는 좀 더 넓고 다양한 시선에서 SF적인 요소들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들을 찾아보며, 이것이 어떻게 해당 아이돌 음악인들의 콘셉트나 내러티브와 얽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얘기해보려 한다.


글ㅣ나원영(웹진웨이브 에디터)


# 느슨하게 교차되는 "사이언스 판타지"

 

오로지 SF에만 충실한 서사나 이미지를 아이돌 팝에서 실현하는 것은 다양한 이유에서 조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장르의 경계를 최대한 넓고 느슨하게 잡으면, SF적인 이미지에 종종 다른 장르의 특징들이 결합되는 성격의 뮤직비디오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SF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부차적인 요소로 등장하거나 간접적으로 암시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SF의 익숙한 클리셰보다도 조금 더 흥미로운 사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나름대로의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이들 뮤직비디오들은 꿈, 시간, 우주처럼 SF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는 동시에 SF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 나아갈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하고, 거기에 다양한 이미지와 서사를 결합시킨다.

아이유 '너랑 나' (위) '시간의 바깥' (아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너랑 나'로 시작해 '시간의 바깥'으로 이어지는 아이유의 여정이다. '너랑 나'의 비디오는 시간 여행이란 소재를 [Last Fantasy]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더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등장한 후속곡인 '시간의 바깥'은 마치 '너랑 나'의 평행 우주 같은 세계를 영상 속에 담는다. 이것을 SF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SF적 요소들을 이 당시 아이유 특유의 판타지적인 이미지에 알맞게 차용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시곗바늘을 형상화한 안무가 나오는 퍼포먼스 파트의 배경 속 무수한 태엽 장치들, 그리고 '시간의 바깥'에서 이현우의 인물이 '너랑 나'의 아이유처럼 복잡하고 자세한 기계장치를 만드는 모습에 더해, '너랑 나'의 후반부에서 아이유가 탑승하는 "타임머신"의 생김새를 보자. 영국의 SF 드라마 <닥터후>에 등장하는 전화박스 모양의 시공간 이동수단인 타디스(TARDIS)의 외형을 떠올린 사람이라면 이 두 곡의 뮤직비디오와 SF의 연관성에 대한 단서를 하나 더 발견한 셈이다.

우주소녀 '이루리' (위) '꿈꾸는 마음으로' (아래)

한편, "사이언스 판타지" 같은 조어와 조금 더 밀접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팀이 바로 우주소녀다. 사실 이름부터가 "우주"소녀인 만큼, 이들의 비디오에서는 별자리가 가득한 밤하늘과 그 너머의 우주 같은 배경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법학교 같은 판타지적인 설정이 추가되는 것을 통해 각기 다른 이 두 이미지들 사이에 화사한 신비함이 서로 교차되고 있다. 달에 지어진 거대한 "소원통신소"를 배경으로 지구에서 소원이 담긴 풍등이 쏘아 올려지는 장면을 담은 '이루리'나, 지구에 생긴 거대한 구멍을 멤버들의 "마법"으로 해결하는 '꿈꾸는 마음으로'의 장면을 생각해 보자.


아이유 '너랑 나'

아이유 '시간의 바깥'

우주소녀 '이루리'

우주소녀 '꿈꾸는 마음으로'


우주소녀 '비밀이야'

다만 '비밀이야'의 경우엔 판타지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 SF적인 이미지들을 조금 더 진하게 삽입한다. 만화 <세인트 세이야> 시리즈의 유명한 명대사인 "네 안에 코스모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비디오가 시작되는 것이나,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타임머신인 들로리안과 닮았을지도 모를 자동차 모양의 우주선은 상대적으로 익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코드들이다. 더불어 그 우주선 속의 엑시와 설아가 끼고 있는 (<드래곤볼> 시리즈 같은) 스카우터나 우주복을 입은 채 (마치 <그래비티>처럼) 지구로 추락하는 연정, 잠시 등장한 천문학 도서 같은 깨알 같은 레퍼런스들은 비디오의 다른 부분에서 등장하는 동상이나 비석, 정육면체의 조형들이나 마법진, 원인 모를 초자연적 현상 등의 이미지와 교차되며 우주소녀만의 확실한 "사이언스 판타지"를 강화한다.

에이프릴 '손을 잡아줘' 'LALALILALA' 몬스타엑스 'DRAMARAMA' 빅스 '다칠 준비가 돼 있어'(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편, 에이프릴의 경우에는 '손을 잡아줘'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타임 슬립"을 시도하거나, 감시카메라가 가득한 새까만 방에 바코드가 새겨진 채 갇힌 멤버들이 어디론가 접속해 탈출을 시도하는 'LALALILALA' 같은 비디오들이 있다. 이렇게 등장하는 SF적인 소재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설명이나 직접적으로 맞닿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에이프릴은 이 코드를 환상적인 내러티브와 따로 배치하거나 삽입하며 간접적인 활용을 시도한다. 이외에도 태권브이 같은 로고와 거대한 공격 장치를 쓰는 군인들, 달로 발사되는 소형 우주선 등의 요소에 무려 뱀파이어의 콘셉트를 합친 빅스의 '다칠 준비가 돼 있어', 강렬한 드라마가 담긴 몬스타엑스의 'DRAMARAMA'에 등장하는 시계 모양의 장치 같은 SF적 코드들은 비디오 속의 주된 서사를 차지하진 않더라도 전체적인 이야기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주소녀 '비밀이야'

에이프릴 '손을 잡아줘'

에이프릴 'LALALILALA'

빅스 '다칠 준비가 돼 있어'

몬스타엑스 'DRAMARAMA'


# 그들 각자의 SF 세계로 접속해보며

서인영 'Let's Dance' (위) 여자친구 'FINGERTIP' (아래)

어떻게 보면 아이돌 팝에서의 SF적 요소가 가장 재밌어지는 경우는 각 아이돌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나 노래에 SF가 적절하게 엮여 들어가는 순간들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 3D 안경을 끼고 네온빛 스페이스 오페라 활극을 펼치는 서인영의 'Let's Dance'의 능청맞은 유머와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삼아 유체이탈과 공중부양, 자동차 액션, 그리고 안무와 결합되는 레이저 건 액션을 펼치는 여자친구의 'FINGERTIP'을 비교해보자. 각 "네온빛 스페이스 오페라 활극"에 있어서 서인영의 경우 비디오와 당시 서인영의 이미지 자체가 코믹하게 대응하는 한편, 여자친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박력 있어진 노래를 받쳐주며 어우러진다. 이 두 비디오들은 비슷한 SF 소재를 곡 자체의 분위기나 서인영/여자친구 각자의 이미지와 그 변화에 맞춰 활용한 좋은 사례일 것이다.

브라운아이드걸스 '신세계'

"양자역학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아이돌 앨범도 있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BASIC]은 그룹의 오랜 관록에 "과학"을 여러모로 접목한 본격적인 시도였다. 음반을 구성하는 여러 이미지와 가사가 과학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타이틀곡 '신세계'는 "패러다임 시프트", "의식의 확장", "모든 공간 빛 스피드" 등을 언급하다 심지어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까지 호명하며 "경험의 세계란 건 실재와는 달랐어"라고 외친다. 아쉽게도 비디오에서는 SF나 과학과 관련된 이미지가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동차에 탄 채 (음반 수록곡의 제목이기도 한) 웜홀로 보이는 큰 통로를 관측하는 브라운아이드걸스을 향해 내뿜어지는 다각형 형태의 빛만큼은 오묘한 SF의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서인영 'Let's Dance'

여자친구 'FINGERTIP'

브라운 아이드 걸스 '신세계'


AOA '빙글뱅글' (위) 빅스 'Rock Ur Body' (아래)

"비디오게임 세계" 역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장치다. AOA의 '빙글뱅글'이나 빅스의 'Rock Ur Body' 등이 레트로의 영역에 살짝 걸쳐 구형 오락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그 등장인물로 나타나는 설정들을 (빅스의 경우에는 칩튠까지 담아) 선보였다면, 소년 공화국의 'Video Game'은 한층 더 나아가 온갖 선들이 치렁치렁하게 달린 채 번쩍거리는 VR 장치와 오래된 CRT 모니터의 검정-초록 컬러, 십자가가 박힌 하얀 텍스쳐로 이뤄진 가상공간을 내세운다. 매우 과장된 방식으로 휘황찬란한 VR 장치를 상대적으로 모노톤인 "비디오게임"의 세계와 대비시키는 소년공화국의 비디오는 특히나 인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소년공화국 'Video Game' (위) 탑독 'TOPDOG' (아래)

어쩌면 SF가 아이돌 팝 특유의 "과잉"적 이미지 자체와 다양하게 연관될 수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던 뮤직비디오 대부분이 사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던 경우는 탑독의 'TOPDOG'이다. <아마데우스> 자체를 레퍼런스 삼은 곡인만큼 음악 자체는 모차르트 교향곡 25번 G단조의 유명한 도입부를 샘플링하지만, 당시 아이돌 팝에 종종 쓰였던 강렬한 덥스텝을 적극적으로 추가하며 이를 뒤틀어낸다. 모차르트와 덥스텝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 'TOPDOG' 비디오의 서사와 의상 등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대립 관계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것은 18세기식 궁전에서 오케스트라를 대동하는 게 아니라 거친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정교한 홀로그램으로 빽빽이 구현된 채 소리와 함께 온갖 레이저를 뿜으며 역동하는 장치를 통한 대결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마치 과장되게 "지휘"하듯이 장치를 조종하는 멤버들의 모습에도 주목해보자.) 누군가에겐 이것이 그저 황당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TOPDOG'은 어떻게 보자면 곡과 콘셉트에 담긴 모든 조합된 특징들을 과잉된 SF와 아이돌의 이미지로 가장 충실하게 구현해낸 비디오다.


AOA '빙글뱅글'

빅스 'Rock Ur Body'

소년공화국 'VIDEO GAME'

탑독 'TOPDOG'


#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는, 다른 곳의 뮤직비디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의 시점에서 주목할 만한 비디오인 아이유의 'eight'으로 "우주 아이돌 뮤직비디오 작전"을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까지 언급된 많은 영상들에서 거대한 기계장치에 누운 채 어딘가로 "접속"하는 아이돌의 이미지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eight'의 경우, 이는 기억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하얀 몸체와 주황색 화면의 기계다. 그 장치 위에 누워 기억 속으로 접속한 아이유는 비디오 속에서 다양한 세계를, 심지어 실사가 아닌 다양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는 세계들까지 오가고, 그 속에서 한 번 더 꿈을 꾸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하며, 꿈과 기억으로 구현된 세계들의 다양한 층위에 접속한다.

아이유 '에잇(eight)'


'에잇(eight)'이 풀어놓는 장면을 보면서 이번 시리즈에서 소개한 비디오에 담긴 여러 SF적 콘셉트와 이미지, 내러티브를 떠올려 본다. SF는 어쩌면 아이돌과 그들이 구축한 또 다른 세계에 확실하게 몰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앞서 이야기했듯, 이야기가 펼쳐지는 규모나 SF 코드들의 직간접적인 활용 정도, 무겁거나 가벼운 분위기의 차이, 레퍼런스나 클리셰의 삽입 등 여러 방식으로 활용된 SF적인 세계 혹은 "세계관"이 존재할 때, 뮤직비디오는 듣는/보는 이들을 이 세계들에 "접속"하게 만드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장치의 기능을 수행한다. '에잇(eight)'에서 기계 장치를 통해 다른 세계들로 접속하는 아이유는, 마치 뮤직비디오를 통해 아이돌이 만든 세계로 접속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기도 하다.


아이유 '에잇(Prod.&Feat. SUGA of BTS)'


(글의 제목은 손지상의 소설 [우주 아이돌 해방 작전]에서 차용했으며, 마지막 소제목은 앙투안 볼로딘의 소설 [미미한 천사들]에서 차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눈에 보는 6월 넷째 주 빌보드 소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