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가 다시 상영되고 있다. 2023년 11월 개봉되어 관객 29,019명 기록 후 종영되었다가 이달 10일 재개봉되었다. 재개봉 후 언론의 호평에 힘입어 관객이 계속 늘고 있고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등 OTT 플랫폼에서는 인기 순위 10위권에 진입했다. ‘어른 김장하’가 재개봉된 이유는 윤석열 탄핵 이후 헌법재판소 권한대행이었던 문형배 재판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회자하면서 김장하 선생 이야기도 함께 조명되어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스틸컷 (시네마달 제공)
‘어른 김장하’는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해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한약방에 점원으로 들어가 주경야독하면서 19세에 한약업사 자격 취득 후 한약방 개업을 해서 번 돈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더욱 존경스러운 것은 자신의 선행을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서 어떤 말이나 주문도 하지 않고, 특정 단체에 지원할 때도 보도자료 등을 일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사 인터뷰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어른 김장하’도 본인의 허락 없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김장하의 이름이 알려진 것도 몇 사람의 끈질긴 취재의 결과라고 한다. 이런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역 사람들 외에 대부분의 사람은 몰랐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존경하는 어른이 없는 상황에서 늦게나마 이분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당대에 존경하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의 삶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 시대마다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있었고 젊은 세대는 그 사람들의 삶과 철학을 배우면서 학습하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때 육성과 친필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매우 효과적이다.
'어른 김장하' 포스터 (시네마달 제공), 고 리영희 선생 (리영희 재단 제공)
지난 세기말까지 한국 사회에서 이런 역할을 감당한 사람은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던 분들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한양대 교수를 지냈던 리영희 선생이다. 70, 80년대 젊은 세대의 사상의 은인이라 할 정도로 그가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당시 대학에 다닌 학생 중 리영희 선생 책 한두 권 읽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리영희 선생의 책을 보고 비로소 당대의 진실이 무엇인지, 독재정권이 무엇을 감추려고 했는지 알 수 있었고, 감춰진 진실을 알았을 때 전율했고, 행동할 이유를 발견했다. 리영희 선생이 베푼 사상의 세례를 받은 젊은 세대들이 80, 90년대 민주화의 주역으로 등장했고, 이들의 헌신과 희생 덕에 한국 사회는 그만큼 진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리영희 선생과 같은 지식인은 더 이상 보기 힘든 시대가 됐다. 당시 리영희 선생의 중요한 역할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70. 80년대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던 때라 중국, 베트남 등 공산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미국에 대한 정보 역시 편파적으로 보도되었다. 출판물은 물론 레거시 미디어에서도 공산권에 대한 부정적 뉴스 외에는 전혀 취급할 수 없었다. 현실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던 젊은 세대의 세계 인식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리영희 선생은 오랜 외신기자 경력과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정보를 발표하면서 젊은 세대의 의식 수준을 고양시켰다.
고(故) 리영희 선생. [연합뉴스 자료사진]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은 젊은 세대는 그전까지 듣고 배웠던 많은 것들이 거짓이거나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사회의식이 고양되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체계적 사고를 구축할 수 있었다. 리영희 선생은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다. 그러나 이제 리영희 선생이 감당했던 역할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많은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유통되고, 쉽게 번역되고 다양하게 해석되면서 레거시 미디어 시절의 지식인 역할은 거의 소멸하고 있다. 전문가가 지식인의 역할을 대신하고 나섰지만, 전문가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정받는 것이지 시대정신을 감당하는 지식인은 아니다.
정보와 데이터가 물처럼 흐르는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는 모든 정보와 데이터는 즉시 분석되고 비판 받는다. 이념적 편향성을 지적받기도 하고 찬반 논쟁도 치열해진다. 이 과정에서 최초 업로드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사라진다. 당연히 더는 글을 올리지 않게 된다. 지식의 민주화가 가져온 현상이다. 김장하 선생을 언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존경은 더 이상 지식에서 나오지 않고 김장하 선생처럼 조용한 실천에서 나온다. 공개적 실천은 당연히 반발을 산다.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실천하는 삶이 존경을 이끈다. 존경이 사라진 시대, 그 힘든 과정을 김장하 선생이 실천했다. 김장하 선생이 소중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