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난 누군가의 죽음을 막았다.
한 일주일 전쯤인가, 친구 A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가 된 지 사 년이 좀 넘게 지났지만 전화를 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던지라 난 의아한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야, 괜찮으면 나와서 한 잔 하지 않을래?"
굉장히 클래식한 멘트였다. 어디 직장인들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나올 법 한 분위기로 말하는 A의 모습이 떠올라 난 피식 웃었다. 문득 전화기 건너편에 있을 A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항상 어른스러워 보이기를 원했던 그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너무나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니 세상의 풍파를 다 맞았다고 해야 하는 편이 좋으려나.
"그래. 나야 좋지. 그럼 어디가 괜찮아?"
약간 당황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시간도 있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 탓에 A를 못 본 지도 꽤나 되었기 때문에 난 선선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강남 뒷골목 외진 곳에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술집에서 만났다. 막 영업을 시작한 술집에는 몇 사람들만이 앉아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A는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A에게 다가가 한 몇 년은 연락이 없었던 듯이 부산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강남역 근처 산다고 여기로 정한 거지?"
"에이, 아니야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야. 여기가 이때쯤 조용하기도 하고..."
A는 뭔가 말하려다 말꼬리를 흐렸다. 뭐, 별 거 아니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밝은 술집의 조명 앞에서 A를 보니 이 친구, 못 본 사이 국토순례라도 했나 싶었다. 통통했던 A의 볼은 꽤나 빠져 있었고 보들보들 하던 피부는 꽤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이건 분명 입시라는 괴물의 짓이 분명하렷다. 같이 싸워주지는 못할 망정 한때 같이 경쟁했다는 사실에 괜스레 미안해졌다.
"너 되게 달라졌다.".
내가 놀라 한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른스럽게 부른 술자리지만 나누는 이야기는 참 우리들 나이다웠다. 아는 친구 중 누가 서연고를 갔고 누가 재수한다는 이야기 같은 시답잖은 잡담과 함께 술이 몇 잔 돌아가고 조금씩 취기도 돌기 시작했다. A는 갑자기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사실 그 이유 때문에 불렀다고 했다. 녀석, 취했나.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문과생인 내가 알려줄게. 그럴 때는 가장 중요한 결론부터 말하고 봐야지.”
“그래. 나 말이야. 너 덕분에 살았어.”
“뭐?”
“네가 내 목숨을 구했다고."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갑자기."
"말 그대로야, 네가 내 목숨 구했다는 거. 꼭 말해주고 싶어."
A는 많이 힘들었다. 수시 6 광탈에 수능도 그리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A는 힘들어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대학을 기대한 부모님의 눈치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그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했고 그 선택도 그러했다. 힘들어하던 어느 날 A는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성적이든 인간관계든 내 성격이든. 다 쓸려 내려갈 것 같아서 너무나 무서웠어. 그런 생각으로 고민하다 보니 막 초연 해지더라고. 그냥 이 삶이 싫더라. 그냥 포기하면 편한 걸. 안 그러냐?”
A는 1월의 어느 날 새벽 한강에 갔다. 그를 멈추게 한 것은 그때 막 온 내 카카오톡이었다. 요즘 힘든 일 많더라도 널 잊지 말라는,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보고 조만간 웃는 얼굴로 보자는 내용의 카카오톡. 다시 되돌아보면 힘들다는 이야기 들은 친구에게 그리 많은 고민 없이 보낸 인사치레 가득한 내용들이었지만 A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쭉 이어나가기로 결심한다.
"그 후로 힘들 때마다 너한테 연락을 했어. 힘든 일 말할 필요는 없었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잡담 같은 것들. 기억 나? 그거 너에겐 별 의미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겐 큰 힘이 되었다는 거. 꼭 말해주고 싶었어."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5분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 그냥 너 말 들어준 게 전부거든.”
"사실 나도 요 며칠 사이 그런 생각을 했어. 별 의미 없는 너와의 대화에서 내가 뭘 찾았던 건지. 난 그때 무슨 생각으로 다리에서 돌아선 건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뒤이어 들더라. 그땐 그게 내가 필요한 전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가 그렇게나 대단한 의미였나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A가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초콜릿 우유도. 잘 마셨어. 맛있더라."
"초콜릿 우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내게 A는 잘 생각해보라는 듯 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문득 A와의 카톡이 떠올랐다. 밥보다는 마실 것이 좋다며 항상 단 걸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그 녀석이 눈에 밟혀 몇 번 초콜릿 우유 기프티콘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땐 그게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아니, 누가 초코 애몽 따위가 사람 한 명을 살렸을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A는 말했다. 그 초콜릿 우유를 마시며 한강에서 집으로 왔다고. 그 초코의 달달함이 삶을 포기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녹여줬다고. 내 눈앞에 조용히 우는 A가 보였다. 휴지를 꺼내 얼른 눈물을 닦아줬다.
술집을 나와 헤어지기 전 A의 등을 툭툭 두어 번 두드려줬다. 우는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A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연락하라는 A의 말을 뒤로하고 가는데 갑자기 초콜릿 우유가 먹고 싶어 졌다.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초콜릿 우유 하나를 샀다.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우유는 참 달고 시원했다. 문득 A가 왜 삶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구태여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이야기를 적는 까닭은 내가 A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이유가 미안해서이다. 아무것도 몰랐던 내 어쭙잖은 생각 덕에 그 친구가 아직도 나와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 난 그 생각에 빚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나도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기에, 그 기억들에 대해 더욱 부끄러워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스무 살을 맞이하며 스스로 정한 20대의 화두는 기록이다. 이 기억들을 끊임없이 기록해야겠다. 잊지 않도록, 잊히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흐르듯이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