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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오리 Dec 31. 2019

닫혀가는 문 저편의 우리

영화<결혼 이야기>



 부부는 결혼이라는 제도 혹은 약속 사이에서 관계성을 바탕으로 각자 자신의 존재성을 재정립한다. <결혼 이야기>는 그 결혼이라는 약속 아래에서 생성된 관계성이 개인과 어떤 조응을 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결혼과 이혼의 과정을 단순히 연결과 단절이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혼을 어떤 결과물로 치부하지 않고 관계의 연속 혹은 관계의 재정립이라는 하나의 단계로 받아들이며 캐릭터들이 그 단계를 거쳐 가면서 적응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이때 캐릭터 각자에게나 관객들에게나 사건의 흐름을 짚어가는 모든 과정의 저변에서는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느껴지는 어떤 감정이 있다. 안타까움이다. 모든 것이 겸허하게 받아지는 것 같은 순간들로부터 숨겨진 감정이 튀어나와버리는 충돌에게까지 모든 광경이 안타깝다. 그것은 비단 영화에서 그려내는 이혼의 과정뿐만이 아니라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이혼 이전의 결혼 생활에서도 스며있다. <결혼 이야기>는 종국에는 이혼으로 끝이 나버리기 때문에 그들의 불협화음이 결혼을 유지하고 있던 그때의 그들 생활 내부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의 제목은 <결혼 이야기>일까? 영화는 이미 둘의 관계가 정서적으로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둘 다는 아닐지언정) 각자의 장점을 열거하는 스퀀스는 부부 갈등 조정사 앞에서 읽기 위해 각자 작성한 글귀였고 찰리(아담 드라이버)의 장점에 대해 쓴 글을 읽을 수 없다는 니콜(스칼렛 요한슨)은 확실히 정서적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영화는 먼저 그 임계점에 도달한 니콜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니콜의 존재를 억압해온 그들의 관계성을 나열한다. 그리고는 찰리에게 이혼 소송장을 주는 LA의 친정집에서부터 영화는 찰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찰리는 일이 이렇게 된 영문을 모르는 듯하다. 찰리는 앞으로 벌어지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일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들의 관계성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찰리는 그들의 관계성이 어떤 경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사유하지 못했고 그것은 곧 상대와 자신의 존재성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못해 왔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것은 헨리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카메라는 그런 소통 불가의 인물을 처벌하듯 바라보지 않는다. 정확히는 소통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 한 인물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그에게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도래하여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는 원래 그런 인물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이 인물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에 카메라를 통해 말해진다. 전기가 끊긴 니콜의 집에 찰리가 찾아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찰리와 니콜 그리고 헨리는 함께 문을 닫는다. 문의 안쪽과 바깥쪽에 각자 서서 문을 닫을 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카메라는 그들의 모습을 각자의 시점으로 빠르게 편집되며 동시적으로 그들이 함께 이 문을 닫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닫혀져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혼의 절차를 밟아가는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서로 힘을 들여야 한다. 찰리 자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관계는 함께 닫아야만 하는 것이다. 찰리가 여태 니콜과의 관계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아 왔지만 그 순간은 그렇게 함께 닫아야만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혼의 과정이 결혼인 것이다. 결혼이 그렇게 그들이 마주한 이혼과 같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헤어지는 과정을 위해 들였던 노력은 실상 그들의 결혼 과정에서 들였어야 하는 노력을 뒤늦게 고스란히 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 이혼 이전의 결혼의 세월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그들이 그런 노력의 과정을 충분히 수행해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자의적으로 유추가 가능하지만 그런 과정을 수행해왔을 수도 있고 충분히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주요한 것은 영화가 그러한 이혼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결혼의 중압감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서로를 조율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상 끝나버린 결혼생활의 관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생활의 지향점을 찾는다. 풀린 신발 끈을 묶어줄 수는 있지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안타까움만을 가져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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