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돌이켜보면
집과 회사가 전부일 때가 있다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반복된 생활패턴 속에 집과 회사가
생활 공간의 전부인 셈이다
아침에 눈 떠 회사에 가서
가면을 쓴 것처럼 일 얘기, 형식적인 얘기
때론 하고 싶지 않은 얘기들로
싹싹해 보이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집에 돌아와 TV 와 라디오로 사람 소리를 대신할 때면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영어회화 학원이었을 것이다
일이 아닌 여러 가지 주제로 얘기를 할 수 있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이기에
모두가 다 YOU가 될 수 있는 그 곳에서
나는 더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어공부라는 명목보다
그냥 대화가 정말 절실했나보다
그는 그 학원의 강사였다
한국에서 7년이나 거주한
이미 한국인이 반쯤은 되어버렸으며
한국어를 구사하진 않지만
한국 문화와 한국식 영어발음에
너무 익숙한 강사였다
그의 강의 방식은
한마디로 '진지'모드
직장인들이 대부분인 공간이어서인지
게임이나 FUN FUN한 수업을 만들지 않았고
미국 내 총기사건, 경찰들의 강압적인 태도
마약, 매춘, 사회적 빈부격차 등
평상시 느꼈던 그의 모든 생각과 울분들을
수업시간에 쏟아내곤 했다
무엇보다 피부색에 대한
뼛속 깊은 울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인이기에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흑인이기에 당해야 하는 수많은 차별들과
한국이 더 편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현실
그리고 한국에서 역시
백인과 흑인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걸 익히 알기에
또다른 울분을 삼켜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감히 이해할 순 없지만
한국 내의 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를 익히 알기에,
특히 강사로써 직업을 구하기에도
혹은 친구나 애인을 만들기에도
흑인이라는 사실이 발목을 많이 잡는다는 걸 알기에
많은 걸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꽤 오랜기간 매일 얘기를 나눠서인지
나의 사고방식에 미치는
그의 영향은 꽤 컸다
한국인이기에 어쩌면 감내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부분도
옳지 않은 관습들에서
깨어나오지 못함에 그는 안타까워 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기에
나이와 직업
남의 시선에 많은 압박감을 느껴야 하고
모두가 가는 그 길을 택해야 하는 현실에
그 역시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특히 한국에 온 목적이
한국사회의 여자에 대한 이미지가 워낙 좋았고
헌신적이고 절대적으로 결혼을 지키려고 할 거라는 그의 생각이
이 곳을 진실한 배우자를 찾기에 적합한 곳으로
선택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많이 달라지고 있었다
이미 20대 어린 친구들에게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결혼의 가치는
퇴색되어가고 있었으며
이태원, 홍대 등의 장소에서 쉽게 마주치는 여자들에게
쉽게 합석을 하고 쉽게 밤을 보낼 수 있는 그들에게
진실성을 찾기란 어려웠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흑인과의 하룻밤'에 대한 환상의 대상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허탈함과 동시에 좌절감이었다고 한다
대화를 즐기는 그와, 대화가 필요했던 나는
수업 시간 내에 제법 많은 얘기를 했고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일 수 있는
한국 내의 고민들로
굳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소신껏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키우는 데
그가 한 역할이 크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좋은 대화 상대였던 그가
수업 시간 외에 커피나 밥 등을 제안하기 시작했을 땐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전혀 이성의 매력을 느낄 수 없었던 것도 큰 이유였지만
함께 나갔을 때 느껴질
수많은 시선 역시 큰 부담이라는 것은
나 역시 한국인임을 절감하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친구로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다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혹시라도 나에게 이성적인 접근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라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걸을 때 느껴지는 그가 아닌
나에 대한 야릇한 눈빛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시선 속에
나 역시 '흑인과의 하룻밤' 환상에 사로잡힌
그저 '밝히는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손한 거절과, 마지못한 응낙
그러면서도 이어갔던 인생의 이야기들이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외국인이기에 친구사이란 그저 친구사이일 뿐
남녀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공식은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냥 좋은 외국인 친구쯤으로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
머리를 '꽝'
치는 일이 있을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