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자신을 분만시킨다.
수없이 자신을 탄생시킨다.
사는 법은 죽는 법에 있다.
자라는 방법은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이다.
죽음과 삶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장이다.
이것이 나이테다.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늘 자신의 시체를 내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무는 그 일을 아주 아름답게 해내고 있다.
낙엽은 나무의 지혜다.
혹독한 겨울에 살아남기 위한 창조적 해결책이 바로 버리는 것이다.
죽음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이 나무의 멋이다.
가장 장엄한 문명의 단편이 장례이듯이
낙엽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삶의 과정으로 창조해낸다.
나무는 해마다 한 해의 삶을 기록한다.
한 겹의 나이만큼 줄기에 그 흔적을 남기고
두꺼워지며 키가 더 자라게 된다.
나무는 매년 죽는다.
이 상징적인 의식이 나무가 자라는 방법이다.
나도 죽어야 한다.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나무가 죽을 때 나도 죽어야 한다.
나에게 낙엽은 책이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일년의 삶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내 일 년도 떨어진다.
그리고 열매를 남기듯이 나도 내 책을 남긴다.
책 한 권이 쓰여지면 내 일년도 지난다.
나무가 다음 해에도 똑 같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이 혹독한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거친 나무는
이미 전해의 그 나무가 아니다.
나도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영원히 죽은 것이다.
살아있으나 이미 죽어버린 정신을 나는 수없이 보아왔다.
구본형의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중에서
나는 왜 비우고 싶어졌을까?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각자에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들을 관통하는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살기 위해 비웁니다.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하느냐구요?
그것이 생명의 원리니까요.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매년 어김없이 대대적인 비움의 의식을 치뤄낼 수 있는 것은
매일매일의 수련과 훈련 덕분이었다는 것을요.
그 수련의 핵심은 온전한 쉼이었습니다.
빛이 들어오는 시간에는 온 힘을 다해 일하지만
빛이 사라지면 온 몸의 힘을 빼고 휴식에 들어갑니다.
물론 휴식의 시간에도 완전히 멈춰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본질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흡수하고 묵은 에너지를 비워내는 호흡은
나무가 휴식시간에 하고 있는 대표적인 생명활동입니다.
제게는 어쩐지 그 시간이
나무가 멈추어 하루를 살피며
그날의 기쁨을 재경험하는 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더라구요.
그 힘으로 또 내일을 힘차게 열어가겠구나!
저도 모르게 막 응원하게 되기도 하구요.
또 위로와 격려를 받기도 했지요.
그러다 살짝 소망을 보태곤 했습니다.
언젠간 나도 나무처럼, 스승처럼
해마다 나이테같은 책을 쓸 수 있게 될 날도 와 주겠지.
꼭 책이 아니라도 새해를 새 정신으로 맞을 수 있는
나만의 의식을 살아가게 되겠지.
그러다 번쩍
어쩌면 나 그 시간을 이미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자각이 찾아왔을 무렵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살림명상>이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살림명상>은
우리 모두의 '살림'을 위한 기도이자 의식인 셈이지요.
제 식으로 아주 친철하고 부드러운 죽음과 재생의 의식.
우리가 함께 떨어뜨린 낙엽으로 무엇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이 의식을 통해 탄생시키고 싶은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https://youtu.be/A06hC89XjwE?si=PElQPA5VkzEOfD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