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곧 '모험'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진실

스스로를 ‘타고난 엄마’로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by 아난다
변화가 요구되는데 변신에 성공하지 못하면 멸종된다.
반면 변신에 성공하면 영웅이 된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극복의 기술을 습득한 자들이며,
새로운 삶으로 탄생하는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이 구도가 바로 신화의 기본적인 틀이다.

제우스에 의해 정복된 여인은 신과 한 몸이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다시 생명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성에 있다.
이렇게 해서 신과 인간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반신반인이다.
새로운 종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이 새로운 반인반신은 모험을 떠남으로써 자신을 수련한다.
그리고 갖은 고생과 고난을 통해 영웅이 되어 귀향하게 된다.
결국 영웅이란 주어진 변화에 창조적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가슴이 뛴다.
평범한 내 속에 위대함이 씨앗처럼 들어있다는 것.
언젠가 그것이 발아할 것이라는 희망.
나는 창조적 변신을 믿기 때문이다.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중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삶을 열어내고 싶었습니다.


'엄마'로만 평생을 살아낼 자신도, '아이'를 뒷전으로 밀어둔 채 나를 다 바쳐도 여한없을 만한 '일'도, 양쪽을 오가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감당해 낼 용기도 없었던 제게

'변신'은 생사가 달린 미션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면서도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엄마인 나의 행복과 아이의 행복이 제로섬의 관계라는 무의식적인 대전제에

물음표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신화'의 힘이었습니다.

신화를 통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게임인 줄만 알았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신화 속에서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는 '난제'를 풀기 위해 모험을 떠난 영웅 후보자는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답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같은 질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의 빛이 됩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 시나리오였습니다.


실패자의 낙인인 줄만 알았던 미결과제가

실은 내게도 '영웅의 씨앗' 이 심겨져 있다는 증거였다니.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당장이라도 짐을 챙겨 모험을 떠나야지요.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다섯 살, 한 살된 아이들을 안고 업은 채로 시작할 수 있는 모험을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존재를 다 걸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이제는 정말 무엇이든 다 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드디어 '영웅의 여정'이라는 든든한 지도까지 찾았는데

정작 어디로도 떠날 수가 없다니!

오직 저 하나만을 믿고 해맑게 숨쉬는 존재들을 두고

대체 어디로 갈 수 있었겠습니까?


소년이든 소녀든 입문 의례는
유아기의 자아를 죽이고,
성인으로 거듭나는 모티프와 관계가 있어요.
소녀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의도해야 합니다.

삶은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입니다.
초경을 경험하면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멀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의 <신화의 힘>중에서


세계적인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야기입니다.

남성이 성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한 데 반해

여성은 그 어떤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대지처럼 출산하고 먹여 기르는 자신 안의 마력을

꺼내 쓸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의 제게 신화, 아니 조셉 캠벨은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던 내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던

자애롭고 따뜻한 스승의 이미지였습니다.

그가 각 문화권의 신화 속에서 발견해 낸 공통된 패턴인 ‘영웅의 여정’은

삶의 새로운 국면에서 허둥대고 있던 저를 위한

통과의례의 매뉴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무사히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거라는 희망은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의지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매뉴얼이 오직 남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니.

아~.


게다가 아무리 뜯어봐도 제게서

여성에게는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는

‘생명을 품어 기르는 대지의 마력’ 따위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았으니

생물학적으로야 준비된 엄마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딱 그것뿐이었습니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하고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나는 불량품이 맞았던 거구나! 신의 실수가 분명하구나! ’


알을 깨고 나온 순간, 뭔가 잘 못되었음을 알아차린 미운오리새끼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상당히 괜찮은 존재라고 믿고 있던 우등생이

별안간 요구하는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면키 어려운 지진아로 전락한 상황은

그야말로 모멸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타고난 결함에서 비롯된 문제라면

언젠가는 ‘백조’로 변신할 수 있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저는 스스로를 ‘타고난 엄마’로 느낍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여성성을 재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요?

에이, 설마요.


‘엄마’ 역할의 핵심기능은

엄마의 존재 자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면

충분한 대답이 될른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희망이라곤 한 조각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만든,

자신을 통해 세상에 온 생명에 대한

본능적인 책임감이야말로

캠벨이 말한 ‘마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엄마’로 '잘' 살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덕분이기도 했을 테구요.

그리고 또 하나.

엄마가 되고 나서 거쳤던 수많은 좌절과 방황, 시행착오들이야말로

여자를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최적의 교육과정이자 '모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던 덕분이었습니다.


산출이 적은 척박한 토양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생살을 찟듯 갈아엎어지고,

다른 생명체의 배설물을 뒤집어쓰는 과정을 통해

천천히 자신이 품은 생명체를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옥토로 다시 태어나는 대지처럼

엄마 역시 ‘아이를 기르는’ 바로 그 시간을 통해

서서히 엄마로서 무르익어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캠벨이 말하는 '저절로'란 한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였던 모양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숙명을 지우는 것이야말로

삶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임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무릅쓴 드라마틱한 모험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척박한 환경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자리에서

내 창조성의 증거인 빛나는 생명이

자신만의 모험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소명을 다하기 위한

오늘치의 수련을 감당하는 것이

스스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이미 진행되고 있던 저의 모험이었음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웅으로 거듭나기 위해

여성, 특히 엄마들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그저 '알아차림'이었던 겁니다.


나의 일상 자체가 영웅의 여정이구나.
지금 여기 내게 주어진 삶 자체가 위대한 '변신이야기'의 한 구절이구나.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그토록 그리워하던 새로운 삶이 첫 호흡을 시작합니다.


물론 탄생은 끝이 아닙니다.

시작일 뿐이죠.

새로운 반인반신은

모험을 떠남으로 자신을 수련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자신 안으로, 일상 안으로 더 깊어집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죽음과 탄생을 통과하며

우리는 점점 자신으로 익어갑니다.

어떻게 하면 충만한 삶을 살면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아난다 살림명상 (2).png

https://youtu.be/tiJ4l5uvAW4?si=kGwgdCuyHkLKUL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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