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직장과 예쁜 아이를 가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
남편을 만난 것은 ‘적당하게 충분히’ 지쳤을 무렵이었다. 아니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십대가 채 두 달이 남지 않은 11월 7일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 안에 만난 사람과 내년엔 결혼하고야 말겠다는 괴상한 주문을 걸어놓고 있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어느덧 11월. 가슴속엔 다급함과 될 대로 되라는 두 마음이 제멋대로 섞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실망을 줄이려는 잔머리로 기대없는 척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소개팅!! 용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랑 1시간 남짓 찻집에서 이야기하고 나와 밥집을 찾아 걷던 길. 비 온 뒤의 촉촉함을 머금은 시멘트길.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시선. 나는 알았다. 이 남자랑 같이 살게 되겠구나. 물건 하나를 사도 한 번에 제대로 사지를 못하고 꼭 한번은 바꾸러 가야하는 성격에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두고 어떻게 그리도 단호할 수 있었는지, 내내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나는 그 신기함을 운명이라고 믿었다.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칼날같은 단호함의 정체를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그와 함께 산지도 7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그 기준은 주로 그가 나에게 주어야 하는 유익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 나보다는 학력고사 성적이 좋을 것. 둘째 최소한 나보다 만원 이상은 꾸준히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셋째 나보다 15센치 이상 크고 20킬로 이상 무거울 것.
다나카상과 헤어지고 계속 사람을 만났는데 어째 하나같이 다들 그렇게나 아담하신지. 아무래도 남편의 두 팔에 번쩍 안겨 침실 문턱을 넘어서는 로맨틱한 시츄에이션은 내 인생의 시나리오에는 없는 장면인가보다. 슬슬 체념하려던 차에 남편을 만났다. 내가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직장, 나이, 대학과 전공, 그리고 눈에 보이는 외모가 다였다. 같은 업계 선배, 세 살 차이, Y대 공대, 180이 넘는 키. 충분했다. 무엇보다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내가 지금껏 그 고생을 했던 것이었구나. 지금까지의 험난했던 탐색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보는 사람만 없었다면 큰 소리로 만세삼창이라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의 마음이었다. 아무리 내 마음에 들었다고 해도 강제로 그와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뜸 물었다.
「어떤 여자를 찾으세요?」
「빨강머리앤이나 작은아씨들의 둘째 조세핀같은 여자요.」
「성격말이죠?」
「예」
「구체적으로 그녀들의 어떤 성격이 마음에 드시는데요?」
「활달하고, 다정한 성격이요. 그리고 둘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잖아요.」
「그것 말고 다른 기준은요?」
「키는 165를 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선배님보단 제가 저를 잘 아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딱 저네요.」
「......................」
진심이었다. 키가 쪼끔 오버되긴 하지만 그쯤이야 디스크, 즉 추간연골의 밀도를 0.1미리씩만 줄여도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경미한 장애일 뿐이니까. 그에게도 충분히 훌륭한 선택이라는 판단이 서자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내내 통신공학이야기만 줄기차게 해댔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심지어는 간간히 웃음까지 터트리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주로 동네 근린공원에서 만나 시장에서 오뎅을 사먹으며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라고는 해도 직장에서 돌아오면 시간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의 그의 자취집에서 보냈다. 한달쯤 되었을 무렵 나는 혼자 살던 집을 정리하고 아예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만난 지 하루만에 동침, 한 달 만에 동거를 시작하고, 다섯 달 만에 결혼을 했으니 그야말로 초스피드로 연결된 커플인 셈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그의 성격이나 뭐 그런 중요한 체크포인트를 점검하고 어쩌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결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 이건 아닌데!’ 싶기도 했지만 원점으로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있었고, 무엇보다 도저히 ‘결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전형적인 공학도였다. 하나의 문제는 하나의 답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답은 자신이 알고 있다. 자신의 답과 다른 모든 가능성은 모두 틀린 답일 뿐이다. 도무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아빠를 보내 드리는 과정에서 그는 내게 너무나 아픈 상처를 남겼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결혼 6년이 되어가던 무렵 그에게 남겼던 유서를 첨부한다
따사로운 봄햇살같은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부서지는 햇살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같은 사람도 되고 싶었습니다. 목마른 당신을 축이는 한잔의 시원한 샘물이고 싶었고, 매혹의 향기로 당신을 취하게 하는 탐스런 꽃송이로 살고 싶기도 했습니다. 당신에게 늘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었고 이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는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지만 죽음의 문앞에서 냉정히 돌이켜보니 전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는 허풍장이일 뿐이었네요.
빈말은 하지 않겠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사랑해’와 입맞춤을 주고받는 5년을 보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제가 안다면 당신도 느끼고 있을테지요. 전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보면 자꾸만 고통스럽게 죽어가신 아빠가 떠올랐으니까요. 마치 아빠의 죽음이 당신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요. 당신을 선택한 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때 전 당신이 아닌 그 누구였더라도 상관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다 병을 얻으신 아빠는 하루가 다르게 기운을 잃어가셨고 저는 뭘 해서라도 아빠를 웃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고이 길러온 딸의 결혼식을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빠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이후 제 눈엔 정말 보이는 것이 없었답니다. 그때 마침 당신이 나타났고, 저의 황당한 서두름을 귀엽게 받아주며 너무나 순순히 함정에 빠져주었죠. 그런 당신이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랑은 아니었어요.
당신도 사랑에 서투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결혼이 아빠를 기쁘게 한 것은 결혼식 그날뿐이었던 거 알기는 하나요? 당신은 언제나 무례했고 배려를 몰랐죠. 그런 당신곁에서 저는 항상 가슴을 졸이며 섣부른 선택을 후회해야만 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시는 아빠의 병실을 지키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요? 지훈이를 임신한지 3개월째 되던 어느 봄날,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저는 도저히 두 분만을 두고 병실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날 당신은 어떻게 했나요? 당신은 그날 아빠의 영혼을 죽였습니다. 그런 당신과 다음날 아침을 맞는 저도 같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아빠는 지훈이가 태어날 때까지 살아계셨어요. 아빠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간이식. 그런데 한국에서는 맞는 간을 구할 수 없었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중국에서의 이식수술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떠나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여행이었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아이를 한번 보고 싶다고 중환자실을 탈출해 조리원으로 찾아오신 아빠의 얼굴은 잿빛. 누가 봐도 완연한 병인. 아빠가 조리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인상이 동시에 찌뿌려지던 걸 아빠라고 모르셨을까요? 그 사람들 중 당신의 표정이 유난히 일그러지는 걸 저는 분명히 보았답니다. 아이 사진이라도 한 장 가지고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며 일회용 카메라까지 준비해오셨는데..싸한 분위기에 당황해 하시며 황망히 조리원을 나서실 때도 저는 당신의 표정을 살피느라 아빠에게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기적이었습니다. 중국사람의 간이 아빠에게 잘 맞았던지 아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너무나 지쳐있었지만 이제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아빠의 눈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힘들어하시는 아빠를 공항에서 맞아 모셔와도 시원찮을 상황이었는데 당신은 마치 남처럼 느즈막히 병원에 도착해 말하더군요. 중국가서 수술하고 온 사람치고 문제없는 사람 없더라고. 그리고 택시를 잡아 부모님을 태우며 말했습니다. 제가 너무 피곤하다고.
결국 아빠는 이식수술을 한지 1년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병실을 지키던 제게 아빠는 말했죠.
「소연아. 참고 살지 말아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면 병이 된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까지 참고만 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라 행복한 시간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성실하고 믿음직한 가장이셨으니까요. 당신은 사랑스런 제 두 아이의 아빠이며 소중한 나의 가족입니다. 당신과 5년을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악의는 없었다는 것을. 당신은 그저 임신한 아내와 태어난 아이의 건강이 걱정스러웠을 뿐이고, 중국에서 수술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사실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진짜 피해자는 당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쓸쓸한 당신에게 저는 뭘 더 내놓으라고 때를 썼던 걸까요. 미안하고 섭섭하고 고맙고 서러운 마음이 뒤섞여 소용돌이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온전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가슴 한켠에 숨어 평온한 행복을 위협해오는 마음의 멍울을 얼른 풀어내야하는데...아프더라도 한켜한켜 벗겨내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어요. 당신의 허물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예요. 부족한 저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여보. 이런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이제라도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지금까지는 원망이 사랑을 이겼을지라도 이순간부터 우리 사이엔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조금 더 일찍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그치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너무 늦어 미안해요. 그래도 사랑해요. 지훈아, 수영아. 이리 오렴.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가족이다. 사랑한다..아가야들..엄마 몫까지 아빠를 많이 사랑해줘야 한다. 엄마도 항상 곁에서 지켜줄게.. 그럼..안...녕...
스스로의 섣부른 결정에 대한 책임감과 아이들. 그리고 이혼한 여자로서 감당해야할 사회적 편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닌 척 애써 누르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슴 한켠은 곪아가고 있었다. 원망과 미움뿐이었다면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만큼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서 내 상처는 점점 더 심하게 부패되고 있었다. ‘愛憎’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른 척 덮을 수도 그렇다고 낱낱이 파헤칠 수도 없었다.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물론 겉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척했다. 나만 모른 척하면 너무나도 완벽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응어리를 품고 있는 한 남편과 나누는 대화는 그야말로 말의 향연일 뿐이었다. 마음을 섞을 수 없는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art 1 구독자 이벤트
매일 매일 다른 대답의 댓글도 완전 환영합니다~^^
https://blog.naver.com/myogi75/223447676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