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7년차에 남편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

빨강머리 앤과 조세핀 마치 사이

by 아난다


보낸 사람 : 미* 11.7.28 18:56:25


웃음이 난다. 2003년 11월 7일. 코엑스몰. 만나기로 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 약속장소에 도착했던 건 별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어. 도착 전에 문자를 보냈지. ‘혹시 아직도 거기 계시나요?’ 내심 당신이 거기에 없기를 기대하면서. 그럼 바로 영화나 한편 보고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거든. 그리고 주선자에겐 “길이 너무 막혀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벌써 가고 없더라구요. 아마 인연이 아닌가 봐요.”라고 대충 둘러대야겠다 했지.


얼굴만 겨우 아는 회사선배가 주선한 소개팅. 엉겁결에 하겠다고는 했지만 대답하고 나니 바로 후회가 되더라구. 결혼으로 갈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지겠냐 싶었거든.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만나서 불편한 시간을 보내야하는 게 너무 부담스럽더라. 흔들리는 스물아홉의 변덕이었던 거지. 그런데 당신이 전화를 걸어온 거야. 계속 기다리는데 왜 안 오냐구. 지금도 기억나. 약간은 화가 난 듯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당신을 만났지.


멀리서도 한눈에 당신을 알아봤어. 그때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직장, 학교, 나이가 전부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기한 일이야. 하지만 어쨌건 그 순간 그 장소에 사람이 당신 하나인 것처럼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당신에게 물었지.


“전 선생님, 맞으시죠?”


당신을 따라 들어간 찻집.


“어떤 여자를 찾으세요?”


눈이 동그래진 당신이 나를 뻔히 쳐다봤지.


“피차 바쁜데 시간 낭비할 것 없잖아요. 제가 선생님보다 저를 잘 아니까 말씀해주시면 객관적으로 판단해 드릴께요.”


“빨강머리앤과 작은아씨들의 둘째 조세핀같은 여자요.”


“성격말이죠?”


“예”


“구체적으로 그녀들의 어떤 성격이 마음에 드시는데요?”


“활달하고, 다정한 성격이요. 그리고 둘 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잖아요.”


“그 것 말고 다른 기준은요?”


“키는 165를 넘지 말았으면 합니다.”


“딱 저네요. 어떻게 하죠?”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몰라. 아마도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말했었나? 그날 커피숍을 나와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는 걸.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


그리고 이듬해 4월 25일에 결혼을 했으니 그야말로 초스피드 결혼인 셈이지? 그것도 벌써 7년이 넘은 이야기지만. 돌아보면 그냥 신기하기만 해. 결혼도 또 그 이후의 세월들도.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또 그만큼 많이 화해하며 채워간 7년이었잖아. 근데 당신 알아? 우리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당신의 이상형 때문이라는 거. 그렇게 고생하고도 아직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그녀가 좋으냐고 물어야 하는 건가?


대답은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의 대답을 의심한다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이유가 없을테니까. 이쯤에서 중요한 고백을 해야겠네. 솔직히 난 의심했었어. 이렇게까지 부딪히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너무 서둘렀던 걸까? 세월과 함께 사랑도 다 흘러가버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내게 과연 인연을 지켜낼 힘이 있기는 한 걸까? 아니 이렇게까지 힘들게 지켜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미친 듯이 대답을 찾아 헤맸지.


마구 구겨져버린 것 같은 인생을 다시 펴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를 돌보는 일이었어. 지금 이 모습이 아니라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살고 싶은 삶의 빛깔은 무엇인가? 책을 통해 동서고금의 현자들을 만나면서 과거도 돌아보고 현재도 살펴보고 또 미래도 내다보며 집요하게 묻고 물었지. 기쁘고도 고통스러운 탐색이 무르익어 한동안 돌보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나만의 세계’를 되찾았을 무렵 내게 찾아온 또 하나의 질문이 바로 가정, 그리고 당신이었던 거야.


그래서 대답이 뭐냐구? 지난 가을이던가? 당신이 말했지. 내가 당신을 깊이 받아들여주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구. 그래. 그때쯤이었을거야. 나의 오랜 방황이 막을 내린 시점이. 당신이 이미 내 존재의 일부임을 깨달았던 거지. 우리 앞에 놓여 있었던 장애물들은 오히려 우리의 관계가 너무나 정상적임을 알려주는 신호였다는 것도.


더불어 장애물처럼 보이는 그 어려움들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징검돌이 되어주리라는 믿음까지. 轉禍爲福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생긴 말이겠지? 방황의 결과, 우리의 인연에 대한 확신은 물론 가족에 대한 성찰의 기회와 '나만'의 해법까지 얻게 되었으니까 말야.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어렵게 되찾은 ‘나의 세계’를 당신과 공유하고 싶어.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를 딛고서야만 ‘당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어. 그렇게 당신과 나라는 두 세계 사이에 징검다리가 놓이고, 그 다리를 통해 서로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세계’를 갖는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 더 많이 싸우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당신은 이 편지를 통해 당신몫의 방황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구. 다 알면서도 이 위험한 편지를 왜 굳이 쓰려고 하냐구?


이유는 딱 하나야.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할 거니까. 내가 지금의 나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나에게 맞는 존재는 전 우주를 통틀어 당신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다면 하루라도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각자의 꿈을 엮어 만든 우리의 꿈을 함께 꾸며 이루어가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보낸 사람 : "Jin" 11.7.30 09:18:52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야. 정말 감격했어.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책 쓰는 일 별로 도와주지도 않고 애들 잘 돌보지 않고 돈 벌어오라고 구박만 하고 등등 그래서 무척 실망스러웠을거야. 그래도 날 좋아해주고 사랑해주고, 나는 정말 행복해.


당신 덕분에 좋은 책도 많이 읽고 좋은 사고도 많이 할 수 있었어.


나도 다시 태어나도 꼭 당신과 결혼할 거야.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것 내 마음속 대리석에 깊이 새겨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사랑해.


보낸 사람 : 미* 11.8.4 11:33:17


언제 답장을 보내놓았던 거야? 이 중요한 메일이 스팸 메일이 묻힐 뻔 했잖아. 후~!! 4일동안 함께 있었으면서 시치미를 뗄 수 있다니..역시 당신이야. ^^


당신 덕분에 좋은 책도 많이 읽고 좋은 사고도 많이 할 수 있었어. 그리고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것 내 마음속 대리석에 깊이 새겨 평생 잊지 않을 거야.


나야말로 진짜 감동했어. 살림살이가 서투른 나 만나서 안 써도 좋을 신경까지 쓰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했었는데...당신이 이렇게 생각해준다니 정말 힘이 난다.


'편지' 정말 좋다. 진작 썼으면 쓸데없는 마음고생은 줄일 수도 있었을텐데...

이게 글의 힘이겠지?


당신 덕분에 1년을 넘게 나에 대해, 가족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어. 그 생각들이 나를 넘어 우리를 풍요롭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구.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했었는데 당신의 첫번째 답장을 받으니 시작하길 잘 했다는 확신이 드네. ^^


이 편지들이 모이면 우리 가족의 현재와 미래를 탄탄하게 받쳐 줄거야. 일종의 가족 행복 네비게이션이라고나 할까? 물론 한번 만들어놓았다고 그것에만 의지해서 평생을 갈 수는 없겠지. 하지만 뭐, 한번 만들어봤는데 까짓거 업데이트가 두려울 리 없잖아?


자, 그럼 본격적인 지형탐색에 들어가 볼까? ^^


이미지 출처 : 게티이미지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