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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편지를 읽고 나서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살피는 시간

by 아난다

짧지 않은 글 참 감동적으로 읽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좋은 글을 남긴 아내가 자랑스럽다. 아내의 글에는 7년간 얼굴을 마주대하면서도 알지 못하던 한 사람의 진면목이 담겨 있었다. 이 귀한 글에 대한 감상을 한마디 말로 끝내기는 너무나도 아까운 느낌이다. 뭔가 여운이 있어야한다. 녹음기에 녹음해서 들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이 아닐까?


아내의 글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그 즐거움이 다시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이번에는 어떤 느낌일까? 그 설레임을 기대하며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역시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만약 아내의 이러한 시도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귀촉도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프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춘추(1943)> 수록


서정주라는 시인은 귀촉도에서 멀리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린 임에 대한 한을 구슬픈 귀촉도의 소리로 노래했다. ‘두견새라는 동요도 있다. 동요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구슬픈 노래다. 여기서도 귀촉도의 울음소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목소리다. 아내의 글이 없었더라면 나도 귀촉도보다도 더 구슬픈 소리로 울어야했을 것이다. 그러한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어서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시 한번 아내에게 감사해야겠다.


남의 글을 읽고 비평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글을 창작하는 것에 비하겠는가? 마음속에 묻어둔 관념․생각․사상들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를 이렇게 짜내고 저렇게 굴려도 자신이 생각한 것을 글로 완벽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출산의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글에 대해 내 느낌을 더할 기회를 준 아내에게 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아내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내가 작성한 글들을 수록해주어서 무척 고맙다. 별 비중없는 글이 주옥같은 글에 섞여서 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 남자100배 즐기기의 전체적인 느낌은 무거움이다. 무거움이 전체적으로 독자를 누르고 있는 것 같다. 여자로서의 절박함, 특히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대한 중압감이 글 전체에서 묻어나온다. 그런 중압감이 없었다면 아내의 글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혼한 많은 여자들이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직장을 다니고 자녀를 양육하고 남편을 내조한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을 것이다. 아내는 그것을 표면으로 드러내어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치유를 시도하고 있다.


결혼을 하면 남자든 여자든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챙겨야 할 사람이 물리적으로 2배가 늘어난다. 거기에 세월이 지나면 자식까지 더해지고, 또 다시 아내나 남편의 형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면 고려해야 할 가족들이 다시 배는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자의 배려는 필수적이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무척 힘들다.


아내의 글은 이러한 확장된 가족보다는 핵가정내에서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다. 옛날에야 남자가 밖에서 돈 벌어오고 여자는 안에서 살림하면서 자녀를 양육했다. 이러한 역할 분담이 최근에까지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나도 약간의 의식 변화가 있긴 했지만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한 것이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이다.


그래서 아내의 글을 읽으며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몸이 2개쯤 되면 하나는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하나는 가정에서 육아를 돕고 아내를 정성껏 보좌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남자를 한명 사서 하나를 가정에 두고 육아를 맡기고 가사를 돕도록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또한, 여자 가사 도우미를 둔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가사를 돕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 가사 도우미가 부모역할까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참으로 육아․가사 등 가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결혼을 결정하고 결혼을 하는 순간, 그리고 얼마 후까지 결혼하면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한사람 더 늘었다는 사실에 정말 기뻐했다. 식사나 세탁 등 결혼 전에는 일일이 신경써야 할 것들을 남에게 미룰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아내와 살아가면서 챙겨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착취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늘 마음 한곳에서는 언젠가는 이 문제가 터질 거라는 기분이 조금씩 생겼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러한 불안감은 내 마음을 더욱더 압박해 들어왔다. 그런 면에서 아내의 글은 참으로 시기상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더 늦어졌다면 그만큼 우리 사이도 더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체력․열정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훈련이나 단련에 의해서 절대량이 증가할 수 있지만, 결혼했다고 갑자기 이러한 것들이 현저하게 증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간은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하지, 결혼했다고 해서, 자식이 태어났다고 해서 이러한 본능이 희생을 추구하려는 경향으로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편안함과 희생을 적절히 조정하면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보고 싶다. 하루에 부부들 각자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100이라고 하자. 그리고 아내는 하루 3끼 식사준비하는데 10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청소하는데 10, 육아에 30, 직장생활 30, 그 외 사회생활 하는데 10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고, 남편은 직장생활 50, 사회생활 40, 독서․운동 등 10을 쓴다고 가정한다. (물론 가정 자체가 적절치 못하다고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설명을 위해 불가피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아내가 육아를 전담하게 되어 30이라는 에너지를 다 쏟아야 한다. 그러나 남편이 육아에 5를 도와주고 식사․청소에도 5를 쓴다고 하면, 남편 입장에서는 직장생활 혹은 사회생활 등에서 10을 줄여야 한다.육아든 뭐든 시간,체력,정신적인 면 등을 따져 어느 한쪽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여자 입장에서는 육아가 25가 되고 식사준비․청소에서 5를 줄일 수 있다. 그만큼 에너지를 덜 소비하게 되어 다른 곳에 쓸 수 있게 된다.


물리적으로만 이렇게 설명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하던 것을 남편이 도와줌으로서 단순히 노동의 분담이 아닌 인간관계에 있어 기쁨, 즐거움으로 인한 심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부부가 적절히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유대감을 증진시킨다.


나는 아내의 글을 통해 이러한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특히 육아에 있어 아내가 거의 전담하던 것을 내가 관여하고 도움으로서 아이와의 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이와 열심히 얘기하고 놀아줌으로서 아이는 아빠도 가족에 있어 소중한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것 같다. 그리고 뭔가 좀 껄끄러운 듯 피하려고 하는 것이 나에게로 다고오고 있음을 느낀다.


육아에 단순히 5를 투입했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익은 5 이상임을 절감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가족의 일원이지만, 주변인에 머무는 아빠들을 흔히 보게 된다. 직장 일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에 열중했는데, 정작 가정에서는 자기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밖으로 돌게 되어 가정에서 돈만 벌어오는 기능적 존재로 전락하고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러한 가능성이 높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시나브로 그런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음에 기쁘다.


현대는 소통의 시대라고들 흔히 얘기한다. 예전처럼 카리스마를 가지고 조직을 이끄는 시대는 지났다. 결국 이러한 변화는 공감하라는 명령과 같다.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 바꾼다면 권위정도가 적절한 것 같다.


한때 우리정치사에서 권위주의 시대가 있었다. 위에서 결정한 내용을 밑에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시기였고, 복종하지 않으면 처벌이 뒤따랐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묻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았고, 윗사람은 하늘처럼 받들었다. 지금은 어떤가? 소통과 공감하지 않는 상사,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제 가정도 이러한 흐름을 더 이상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내가 이 글을 시작한 이후 인터넷상에서 편지도 주고받고 직접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또한, 많이 싸웠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고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달라진 것은 아내와의 관계만이 아니었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다른 관계들을 진지하게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이 시대가 정말 요구하는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내게 고마운 기회를 준 아내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맺으려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www.lupi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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