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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an greene Feb 12. 2024

반복과 수단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하여



구글 ‘산업혁명’ 검색결과 이미지


1.

같은 것을 반복하게 되면 우리의 관념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수단으로 인지하게 된다. 맨날 먹는 밥의 품종과 원산지를 궁금해하지 않고, 맨날 입는 옷의 재질과 두께가 어떠한지 느껴보지 않으며, 맨날 자는 침대의 가로 세로 길이, 부피를 재보지 않는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을 위해 매일 반복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반복되면 수단으로 인지된다’는, 일반명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인과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그 대상에 ‘인간’을 대입하더라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복-수단-인간’ 세 키워드의 교집합에 들어가는 예시로, 19세기 산업혁명이 떠오른다. 인류에게 비약적인 생산성 증대를 안겨줌과 동시에, 인간이 기계의 부품처럼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3.

밥이라는 대상의 반복행위는 ‘먹는다’이고, 인간을 대상으로 한 반복행위는 ‘사회생활’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인간은 정도와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사회생활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의식주의 개별 행위들처럼 매일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생활의 빈도가 높으면, 인간을 수단으로 인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쌀눈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4.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면 안 되는 것인가? 당위의 문제로 접근해 보면 어떠할까.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먼저 든다. 이는 우리가 유년시절부터 ‘인간다움’은 가치 있는 것으로 학습해 왔으며, 현재 소비하는 콘텐츠들에도 그러한 관념이 전방위적으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극한의 상황 속, 남편은 생존을 위해 동물적 본능으로만 행동하나, 아내는 시종일관 인간다움을 고수한다. 두 관념의 충돌이 영화 내내 지속되다가, 결국 남편이 죽고 아내가 생존하는 결말은, ‘인간다움’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방증일 테다.


5.

인간다움의 정의와 삶에서의 실천은 각자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답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되고 싶지 않다’라는 최소한의, 보편적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시대 흐름은 이러한 보편적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느낀다. 소비자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가판대에 진열된 상품들처럼, 인간도 다양한 플랫폼과 소셜미디어라는 가판대 위에 진열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 법률, 청소, 이사 서비스 등을 제공해 주는 플랫폼의 개인들, 커리어를 나열하는 LinkedIn, 연애 상대를 물색하기 위한 소개팅 어플의 개인들, 자기 PR을 위한 인스타그램 포스팅과 스토리 속 개인들, (대체로 여성을) 성상품화시킨 clickbait thumbnail의 유튜브의 개인들. 인간의 상품화가 엔터 산업에만 국한된다는 것은, 이제 옛날 말이다.


6.

현대사회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상상할 수 없는 편리함과 경제적 해자를 얻었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상품화를 가속화시켜 200년 전과는 상이한 형태로 인간다움을 잠식하고 있다. 이를테면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개념도,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대항마로서 개성과 다양성이 발현된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 스스로를 상품화시켜, 타인의 구매대상이 되고, 내가 타인을 구매하게 된다. 그래서 퍼스널브랜딩은, 개인의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고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올려줌과 동시에,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과정 역시도 촉진시킨다 느낀다.


시대 변화는 거스를 수 없기에,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각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파훼법이다. 다만, 쿠팡에서 판매되는 사과, 그리고 청소연구소의 화장실 청소 서비스처럼, ‘인간’이라 labeling 된 품목이 시장에 편입된 것을 보며, 인간다움에 대한 재고해보게 된다.


인간다움은 무엇이며, 인간다워야 하는 것인지, 인간다울 수는 있는지. 나아가, 잃지 않아야 할 곤조마저 버리고 시류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지.

 

7.

일개 시민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것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앎에도 , 그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행동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죽음이라는 고정된 결괏값을 알고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앞으로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성이 짙어지고 종국에는 인간다움이 상실되는 것을 막는데, 나의 인간다움에 대한 고찰과 글쓰기가, 실질적인 기여를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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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연휴는 왜 벌써 끝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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