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보문사에서 마음을 위로받다
스산한 계절이다. 마음 한켠에 찬바람이 서늘하다. 나이가 들수록 1년의 체감속도는 점점 짧아진다. 20대는 시속 20km, 40대는 시속 40km. 나이 앞자리 수만큼 속도는 배로 빨라진다. 이런 쓸쓸한 계절에는 마음을 보듬어줄 만한 것이 필요하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따라 마시는 따뜻한 보리차 한잔이라던지 겨울밤 메아리처럼 퍼지는 하얀 찹쌀떡이라던지. 그리고 또 하나를 찾았다. 마음을 보듬어줄 장소.
이곳은 어디일까. 이국적인 풍경이지만 분명 우리나라이다. 핸드폰 카메라만 달랑 들고 찾은 이곳은 강화 <보문사> 가는 길이다. 석모도에 위치한 이곳은 얼마 전까지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던 섬이었다. 하지만 도로가 개통되면서 차량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가는 길목엔 이런 풍경이 맑은 날 빨래 널리듯 흔히 널려있다. 도로가 개통되면서 우리는 편리함과 함께 아름다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보문사에 도착하니 드높은 경사가 우리를 기다렸다. 안 쓰던 아킬레스건이 땡긴다. 대략 5~10분 정도를 올라야 했다. 예부터 사찰을 높은 곳에 지은 이유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올라가면서 뛰는 심장박동과, 올라갔을 때 탁 트이는 시각적 경외심. 하지만 2017년 겨울 보문사의 오르막은 낭만적이었다. 앙상하지만 고요한 풍경이 사람을 편하게 한다. 시청각적인 시원함이 밀려온다. 복잡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입구에는 500 나한이 있다. 진풍경이다. 석가 생존 시, 혹은 열반 후 결집한 500명의 비구를 의미한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같은 표정의 나한이 없다. 익살스러운 500개의 표정이 진을 치고 있다. 같이 갔던 일행이 넌지시 이야기한다. "이곳이 소위 기도빨이 그리 잘 먹는 곳이야." 안 그래도 500명의 표정들을 보니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갈무리되어 있는 이곳엔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서려 있는 듯했다.
며칠 전 왔던 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처마 끝엔 날카로운 고드름이 달려있다. 계절이 그대로 얼어버렸구나. 아 낭만이여.
절의 중앙에 감나무가 있다. 하늘을 떠 받치고 있다. 까치밥 일부와 따지 않은 감들이 알록달록 걸려있다. 감의 주황색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스며있다. 계절의 색깔을 옴팡 담고 있는 감나무가 마음에 든다. 흑백에 컬러 점이 찍힌듯하다. 봄여름 가을을 견뎌온 뇌쇄적인 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부여잡는다.
중앙에 <극락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들어가면 불상이 있는데,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슬면서 머금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흐뭇한지 보고 있는 나도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마음에 쌓인 먼지들이 소멸되는 느낌이다. 이 맛에 산사에 오르지 아니하겠는가.
하지만 보문사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소원이 이루어지는 길. 이 길을 따라 꼭대기로 올라가면 유명한 해수관음상 <마애석불좌상>이 있다. 거기까지는 가파른 계단을 계속 걸어야 한다. 꼭대기까지는 대략 20여분의 시간이 걸린다.
몇 걸음 올라 뒤를 돌아보니 절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온다. 마침 오후 그림자가 길어질 참이다. 햇살이 좋고 바람이 좋다. 그때 내려가는 한 커플들이 장난을 친다. 대략 40대 후반쯤.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유쾌하다. 우리 모두 이렇게 즐겁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소원을 빌고 내려갈 것이다.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중간 즈음 올라가면 소원종이를 빈병에 담아 줄줄이 걸어놓은 장면이 보인다. 흡사 남산의 자물쇠 같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소원은 넘쳐난다. 자물쇠에 적혀있기도 하고, 광목천에 적혀 있기도 하고, 이렇게 병 속에 담겨 있기도 하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로또를 사듯이 사람들은 또 그렇게 마음속 희망을 하나씩 만들어갈 것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광활한 세상이 보인다. 바다가 펼쳐져있다. 강한 햇살에 부딪힌 육지가 존재한다. 그리고 파스텔톤의 하늘이 섞여있다. 그 앞으로 연등이 수를 놓고 있다. 높은 곳에 서면 더 넓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인듯했다. 항상 작은 것만을 보면 작은 생각밖에 할 수 없다. 한 번씩은 이런 시야가 필요하다.
드디어 정상이다. 연등이 금빛이다. 사실 나는 이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고 싶었다. 연등이 금색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은 무채색이 더 잘 어울리는 듯했다.
<마애석불좌상>, 관음보살 상이다. 관음보살은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에게 모습을 드러내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다. 연꽃 위에 앉아있는 <마애석불좌상>은 가슴에 만(卍) 자를 새기고 번뇌를 씻어주는 깨끗한 정병을 들고 있다. 오후 햇살을 그득 받은 좌상이 이상하게 감동을 자아낸다. 좌상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얻은 것은 바로 넓은 마음일 것이다.
대략 2시간 정도의 힐링 시간이 끝이 났다. 올라갈 때의 스산한 마음과 달리 내려올 때는 충만한 마음과 따스한 마음이 교차했다. 겨울 그것의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탈진 경사길을 올라가는 순간 마음처럼 몸도 따뜻해졌다. 기나긴 겨울 마음 외로울 제 이곳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행정보>
주차장 넓음 <주차비 2,000원>
입장료 <성인 2,000원 / 청소년 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