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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you Feb 08. 2022

뒷북 리뷰: <라쇼몽>

겁쟁이와 거짓말쟁이의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

“모르겠어. 도저히 모르겠어.” 영화 <라쇼몽>을 관통하는 대사를 꼽으라 하면, 나무꾼의 첫 대사를 선택할 것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날, 폐허가 된 나생문羅生門(라쇼몽)에 세 사람이 만나게 된다. 거칠게 쏟아지는 비를 피해 나생문으로 도망쳐 온 한 남자와 이미 그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승려와 나무꾼, 이 3명의 남성들이 극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무꾼의 대사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남자는 나무꾼을 향해 대체 어떠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렇게 괴로워하는지 궁금해한다. 나무꾼은 궁금함에 몸부림치는 남자에게 자신이 경험한 미스터리한 살인사건을 알려준다. 


나무를 하러 가던 중, 비명소리가 들리자 나무꾼은 그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도착한 곳에는 몇몇의 물건과 사무라이의 싸늘한 시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흘 후,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관아에 참고인으로 끌려간 나무꾼은 그곳에서 길을 가다 사무라이를 마주친 승려와 함께 참고인으로 서게 된다. 그들은 살인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의 사건 설명을 듣지만, 사건은 점차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각자의 해석과 관점의 뒤범벅이 되며, 승려와 나무꾼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관아에서 도적은 호기롭고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관아에 잡혀있으면서 섬뜩한 웃음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며, 용맹함을 과시한다. 도적을 포박해 온 사람이 관아에 '말에서 떨어진 것을 잡아왔다'라고 말하자 도적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을 마시고 복통으로 쓰러진 것'이라고 되려 호통을 친다. 또한 자신의 칼을 20차례 이상 받아낸 사무라이를 칭찬하며, 아무도 그와 같이 자신의 칼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또한 그의 아내가 단도로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습이 당찼기에 탐이 났다고 자신의 남성적인 지배욕을 뽐내기도 한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도적의 증언과는 달랐다. 당차고 강해 보이기는 커녕 연약해 언제라도 쓰러질 것 같아 보인다. 그녀는 도적에게 겁탈을 당한 후에도 남편(사무라이)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사무라이는 그녀를 비난했다고 주장한다. 사무라이의 싸늘한 시선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죽어가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 번의 다짐으로도 그녀는 자결하지 못했고, 관아에서 자결조차 못한 비참함을 한탄한다.


사무라이의 영혼은 무당에 빙의되어 사건을 증언한다. 사무라이는 겁탈당한 아내가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닌, 오히려 도적에게 본인을 죽여달라고 청탁을 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도적은 지아비를 죽여 달라는 어이없는 부탁에 오히려 아내를 죽이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사무라이는 도적의 인의 있는 그 모습을 보았기에 본인을 습격하고 아내를 겁탈한 일을 용서함과 동시에 명예가 실추된 자신이 스스로 단도로 자결했다고 주장한다. 


누구의 증언이 맞는 것인가?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으며, '왜' 사건들의 묘사가 다른 것인가?


영화처럼 한 사건을 두고 그것을 경험 혹은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제각기 인식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를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라고 한다. 사회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개인들로 구성돼있다. 각각 자신들이 성장하며 갖게 된 가치관과 신념 등이 있으며,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이것을 방치한다면 그것은 곧 홉스가 말하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사익추구를 제한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기준을 통해 잘잘못을 가릴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범위 내에서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 역시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성은 곧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사상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연결된다. 절대적 가치가 없는 상대성만 남아있는 사회가 <라쇼몽>의 세계이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믿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살인 사건의 이야기에 혼란에 빠져 남자와 나무꾼 그리고 승려 모두가 말을 못 하고 있는 순간, 나무꾼이 소리친다. “그건 거짓이야 사무라이의 가슴엔 단도가 꽂혀 있지 않았어, 그 남잔 장도에 죽었다!” 사실 나무꾼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에 있던 단도를 훔친 사실과 사건에 엮이고 싶지 않은 그는 함구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무꾼은 도적(다죠 마루)이 신부를 겁탈한 후,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며 유혹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자는 그 도적이 다죠마루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태도를 바꿔, 사무라이와의 일대일 대결을 통해 자신을 차지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아내의 지조 없는 모습을 꾸짖으며, 도적과의 대결을 피하려고 한다. 다죠마루 조차 지조 없는 신부를 포기하자, 신부는 사내대장부 자존심들을 건드리고 두 남자의 칼의 대결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 대결은 도적이 증언한 것처럼 현란하지도 않았고, 사무라이가 주장한 자결만큼 명예롭지 않았다. 서로의 칼을 한번 맞대는 것조차 힘겨운 겁쟁이들의 싸움, 허공을 향한 칼질,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움직임, 주위 낙엽만 흩날리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사에 등장한 어떤 사무라이의 대결보다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목숨을 거는 싸움은 이야기와 같이 현란하지도 비장하지도 않는다. 서로의 목숨만을 부질 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연속일 뿐이다. 사실 그들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사무라이와 도적은 신부를 같이 비난했고, 신부를 버리려고 했다. 명예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비장하지도 않았다. 명예보다 목숨이 더 귀중함을 알았던 그들이지만, 서로를 향해 칼을 뻗지 않는다는 신뢰가 없어 결국 겁쟁이들의 싸움을 시작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나무꾼의 증언을 신뢰할 수 있는가? 그는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인 단도를 훔쳐 달아났으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는 관아에 거짓으로 함구했다. 신뢰할 수 없는 그의 이야기를 우리는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는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 찼으며, 자신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이 인간을 못 믿는 사회, 진실을 말한다는 거짓말쟁이들의 세상, ‘오니’조차 무서워 인간을 피해 달아난 세상이 라쇼몽의 시대 배경이다. 


  <라쇼몽>은 전란과 기근, 각종 재해와 전염병이 넘치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의 개봉 역시 1950년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수선하고 황폐한 사회 분위기가 넘치는 시대이다. 2차 세계대전 역시 각종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잔혹한 학살과 전쟁의 아픔으로 가득한 사회는 <라쇼몽>의 배경과 다를 것이 없다. 승려는 불신의 사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이 무서운 사회가 지옥이라고 믿지 않는다며, 아직 인간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갑자기 나생문에 버려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게 되고, 남성은 아기와 같이 있던 옷들을 훔쳐 달아나고자 한다. 그런 모습을 나무꾼은 악마라고 비난하지만, 오히려 남성은 갓난아기를 버린 부모들이 악마이며, 자신은 생존을 위한 정당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나무꾼의 이중성을 비아냥거리고 그는 빗속으로 멀리 사라진다. 


나무꾼이 말했듯, 다죠마루도 신부도 사무라이도 이기적인 변명만 하고 있다. 하지만 나무꾼 역시 위증했고, 단도를 훔쳐갔다. 남성은 생존 행위라는 이유만으로 보편적 도덕률을 무시한 자신을 정당화한다. 불신이 가득한 지옥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살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은 나름대로의 답변을 내놓는다. 


나무꾼은 승려에게 6명이나 7명이나 그만큼의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똑같이 힘이 든다며, 승려에게 자신이 키우겠다고 말한다. 승려는 그가 아기를 팔지 않을까 의심하지만, 그를 믿기로 결심하며 아기를 그에게 건네준다. 아기를 안고 비가 그친 나생문 밖으로 나가는 나무꾼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의 진심을 믿어준 승려 덕분일까 그의 눈빛은 아기를 안고 걸어가는 동안 희망에 가득 차 빛이 났으며, 걸음걸이에는 영화 중반까지 보지 못했던 힘찬 모습을 보여준다.


 나무꾼과 승려는 '인류애'와 '신뢰'를 통해 <나생문>을 벗어났다. 나무꾼은 물론 남성이 말한 것처럼 비싼 단도를 처분하기 위해, 살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음에도 함구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후회하며, 성찰한다. 그는 거짓말과 자신의 행위를 변명으로 치부한 이야깃 속 인물들과는 다르게 마지막에 아이를 지킨다는 선택을 한다. 훔치는 과거의 선택을 버리고 지키는 선택을 한다. 이야깃 속 인물들이 사무라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일 때, 나무꾼은 버려진 한 아이를 살리는 것을 선택한다. 


유럽은 두 번의 전쟁을 겪었지만, 더 이상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우리는 이념으로 갈라져 서로에게 총구를 겪던 또 다른 형제와 지금 평화를 위해 손잡고 걸어가고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지옥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신뢰'와'인류애'이다. 신뢰의 순간, 우리의 시야를 가리던 비가 그치고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유럽이 겁에만 질려 독일을 믿지 못했다면, 세계는 여전히 전쟁의 위협과 안보를 둘러싼 으름장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북한을 믿지 못한다면,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을 믿었고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가 손을 잡았고 같이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선을 넘었다. 


전쟁이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또 다른 전쟁 위협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안보 딜레마. 

지옥은 불신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2018.11.10 작성 

2020.04.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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