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브뤼헤 그리고 지옥
한국판 제목인 <킬러들의 도시>는 마치 영화 ‘존 윅’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2009년에 개봉한 영화 <킬러들의 도시>를 한참 뒤에 개봉한 영화인 ‘존 윅’과 비교하기엔
두 영화의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다. 두 영화는 내용과 장르의 측면에서도 완전히 다른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제는 ’In Bruges’인데, 여기서 Bruges는 영화의 주 배경인 벨기에의 도시 ‘브뤼헤’를 뜻한다.
브뤼헤는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도망쳐 간 도시이다. 두 킬러인 ‘레이’와 ‘켄’은 그의 상사인 ‘해리’의 명령으로 잠시 브뤼헤로 피난을 간다. 브뤼헤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도시로 중세의 건물들과 모습들이 잘 보존되었다고 하는 도시이다.
영화 초반부, 레이와 켄은 브뤼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데, 그 둘의 모습은 꽤 대조적이다. 오래된 도시 건물 등을 보는 것이 여간 지루한 레이는 시종일관 브뤼헤를 욕한다. 그에 반해 켄은 브뤼헤의 낡은 건물들을 구경하는 것과 역사를 알아보는 것에 꽤나 흥미를 보인다. 하지만 레이와 켄이 브뤼헤로 온 이유는 단순히
관광하며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레이는 주교를 암살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아이를 죽인 것, 즉 킬러들이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영화는 시작 배경부터 아이러니와 대비를 갖고 시작한다. 아름다운 도시 브뤼헤로 도망친 킬러이자
아동살해범인 주인공의 이야기, 역사와 과거를 좋아하는 켄과 달리 아동을 살해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과거를 싫어하는 레이 등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또 다른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두 킬러의 보스 해리는 켄에게 원칙을 깬 레이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사실 해리가 레이와 캔을 브뤼헤로 보낸 것도 레이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었다. 해리는 어렸을 적, 추억으로 브뤼헤를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런 아름다운 도시를 마지막으로 레이가 구경하고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우습게도 레이는 시종일관 브뤼헤를 망할 촌구석이라고 욕을 했지만 말이다.
그 외의 수많은 아이러니가 가득한 이야기는 결국 심판을 향해 다가간다.
켄이 아직 레이의 암살 의뢰를 받기 전, 그 둘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구경한다. 지옥을 묘사한 그림을 볼 때와는 달리 연옥을 발견한 레이는 관심을 표한다. 연옥은 가벼운 죄를 지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 선행을
쌓는 곳이다. 켄이 해리의 지시를 받아 암살하러 공원에 갔을 때, 그는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을 하려는 레이를 보고 만다. 켄은 레이의 자살을 저지하고 레이의 암살 역시 포기한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레이에게 켄은 죽은 아이 대신에 살아있는 한 아이를 살리라고 조언한다.
켄이 암살을 포기하자 해리는 직접 브뤼헤로 켄을 처단하려고 간다. 켄은 해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할 뻔했지만, 결국 레이에게 앙심을 품은 남자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해리는 레이를 죽이기 위해 탑에서 내려가지만, 켄은 레이를 살리기 위해 상처를 움켜쥐고 탑을 올라간다. 이런 하강과 상승을 통해 영화는 천국과 지옥을
보여준다. 한 남자를 살리기 위해 탑을 올라가는 것, 한 남자를 죽이기 위해 내려가는 것.
심판을 위해 브뤼헤를 찾은 해리가 가고 있는 장소는 지옥이다. 죄를 지은 자를 벌하기 위한 장소이다.
켄이 올라간 공간은 안개가 자욱해 마치 하늘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켄은 죄를 지은 레이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탑에서 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의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땅으로 떨어진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처럼, 켄의 죽음으로 인해 레이 역시 생명을 구하게 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한 브뤼헤로 온 해리는 바로 그 원칙 때문에 브뤼헤에서 죽음을 맞는다. 레이를 살리기 위한 켄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가장 죽을 짓을 한 레이는 브뤼헤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과거에 일어난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처벌은 과거의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여전히 과거는 과거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처벌의 심판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심판자 역시 똑같은 원칙 위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객의 양심에 달려있다
2020.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