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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지환 Aug 18. 2016

플란다스의 개와 루벤스

네로가 좋아했던 그 그림들

장소는 눈보라가 사납게 내려치는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의 작은 마을. 배고픔과 추위에 지친 소년이 마을의 성당으로 들어간다. 평소에는 금화 한 닢이 있어야 볼 수 있던 그 그림을 오늘따라 마음씨 좋은 성당지기 아저씨의 도움으로 운 좋게도 보게 된다.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소년. “마리아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것만으로도 이제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이것이 소년의 마지막 말. 이 말을 끝으로 소년은 추위와 가난 그리고 그를 향했던 마을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이 없는 곳으로 떠났다. 그때 살며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개 한 마리. 개도 소년 곁에서 눈을 감는다. 천사와 함께 개가 끄는 우유 수레를 타고 하늘을 오르는 소년. 소년 앞의 그림처럼 말이다.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지만 늘 그렇듯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 속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라고 하나보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다섯시 삼십분.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가도 칸트의 산책마냥 재깍 집에 돌아와서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숨죽이며 바라보던 만화 영화 ‘플란다스의 개’. 많은 장면들이 아직도 떠오르지만, 그 중에서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하늘나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절대 변하지 않는 보석과도 같은 순간들이다.


바로 앞까지는다가갈 수 있지만 가려진 커튼 때문에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던,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그 그림들은 과연 어떤 그림들일까? 단서는 만화에서 나오는 “루벤스”라는 화가의 이름뿐. 이단서를 이용해 추적 끝에 안트워프 대성당에서 그림들을 마주했을 땐, 더 이상 다섯시 삼십분에 만화를보러 TV 앞으로 달려가지 않는, 카드값과 주간보고를 걱정하는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루벤스의 작품 앞에 선 순간만큼은 다시 만화영화 앞으로 달려가던 시절로돌아가 네로를 떠올리며 설레였다. 스마트폰으로 루벤스라는 작가를 검색해본다. 네로가 좋아했던 단 한 명의 화가 말이다. “파트라슈, 나는 저 화가가 참 좋아!”라던 네로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피터 파울 루벤스 (Pieter Paul Rubens, 1577. 6. 28. ~ 1640. 5. 30.)는 시대가 만들어낸 천재였다.그가 평생 남긴 3,000점이 넘는 작품의 수, 6개국어를 할 수 있었던 외교관, 아마추어 건축가에 철학과 문학까지 두루 섭렵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단 한마디, 그 시절 원조 “엄친아”. 평생 100점 안팎의 작품을 남기던 당시 화가들과비교해서 루벤스가 3,000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어떤 작품들이 시장에서 요구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했고, 여러화가들을 고용해서 공장식 분업 시스템이라는 효율적인 작업 방식을 만들었다. 특정 분야만을 고집하지 않고, 섬유와 건축물, 실내 인테리어 등 당시 시장에서 요구하는 다양한분야에서 창작활동을 했다. 또한, 고용된 화가들의 재능을정확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에 그들을 배치하고 작업 단계들을 세분화했던 것이다. 루벤스가 스케치를 그리면, 풍경을 잘 그리는 화가, 동물을 잘 그리는 화가 등이 각 단계별로그림을 완성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선 루벤스가 전체적인 터치 감을 조율한 뒤, 서명을 집어넣게 되면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루벤스는 그의 그림을독점하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작품들이 어떤 화가의 도움을 받았는지 기록에 남아있다. 그가 한편의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되어가는 전자제품과도 비슷해 보이지만, 그 누구도 그의 작품을 공산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3,000점이넘는 작품 모두가 예술이 되었다. 그래서 세계 유명 미술관을 찾아가면 미술관 근처에는 맥도널드를 미술관작품 속에선 꼭 루벤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스마트 폰 검색 종료 버튼을 누르고, 안트워프 성당의 제단화 앞에 선다. 네로가 있던 그 자리에서 보니, 만화 속에 나왔던 바로 그 작품이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려짐”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짐”. 두 작품 모두, 사선의 역동적인 구도로 연출되어 있다. 빛의 극적인 효과를 잘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둡고 밝은 부분의 대비가 또렷한 것이 인상적이다. 등장하는 예수의 몸도 왜소하지 않고, 식스팩이 또렷한 근육질이다. 웅장한 느낌, 이것이 바로크 양식이라는 것일까? 미술시간에 그렇게 외워지지 않았던 것들이, 실제로 미술 작품을 보게 되니 바로 이해가 된다. 루벤스의 작품들은 일상의 소소함마저, 극적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려짐” 아래에 보니, 개 한 마리가 보였다. 동양에서 온 내가 안쓰러웠는지 지나가던 한 할머니께서 루벤스가 옛날 플란다스 지방의 개를 종교적인 충성의 의미로그려 넣은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다. 그리고 루벤스에게 애완견이 한 마리 있었는데, 이름이 바로 “파트라슈” 였다는것도 덧붙이시면서. 어쩌면 저 개가 파트라슈였을까? 루벤스의작품도 대단하지만, 루벤스의 그림 한 켠에 있던 개 한 마리를 보고 “플란다스의개”라는 작품을 만들어 낸 상상력에도 경외감이 드는 순간이다. 루벤스와 관련해서 재미난 것 중 하나는, 3,000점이넘는 루벤스의 작품 중에, 한복 입은 남자도 있다는 것이다. “플란다스의개”가 안트워프 성당의 제단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한복입은 남자는 우리나라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의 모티브를제공한다. 


네로에게 화가라는 꿈을 심어준 이 화가는 화가가 아니라 회사에서 내 중간 관리자로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21세기의 내게도 영감을 준다. 전공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장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재능을 정확하게파악한 후배들에게 적재적소에 맞게 일을 나누고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것 그리고, 성과에 대한 공정한보상까지. 이러한 단계를 대입해도 무방할 테니깐 말이다. 

성당을 나오면서, 까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 병 시켰다. 벨기에까지 왔으니, 호기 있게, “호가든”을 한 병 주문하는데, “후아르던”이라고가르쳐 주신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러 왔다는 내게 배달된 맥주는 “금단의열매”라는 한국에선 보지 못했던 맥주였는데, 무엇보다 맥주라벨이 인상적이다. 루벤스의 작품이 교묘하게 패러디되어 있었다. “네로, 나도 루벤스가 좋아졌어!”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흥얼거렸다. 

“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는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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