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성 이봉희 Nov 04. 2024

[ 제로의 시대 ]

Z-32 엠페스

윤재는 바삐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며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들이 조용히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윤재는 스스로가 엠패스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 엠마가 그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윤재, 요즘 더 피곤해 보이네. 괜찮아?"


윤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다고는 말할 수 없어. 나는 감정에 예민한 사람이야. 사업을 하면서 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들의 감정이 마치 나한테 흡수되는 것 같아.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그런 감각을 지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


엠마는 그를 이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윤재, 그건 어쩌면 네가 엠패스라는 걸 의미하는 걸지도 몰라. 사람들의 감정이나 에너지를 마치 너 자신처럼 느끼는 거야.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치고, 혼란스러워지는 거지."


윤재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내 감정을 나 자신과 분리할 줄도 모르겠어. 타인의 감정이 마치 내 것처럼 느껴지니까, 피로감이 심해질 때가 많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까지도 내 안에 쌓이는 느낌이야. 사람들을 돕고 싶어도 가끔은 그들에게 휘둘리는 내가 버거워."


엠마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며 말했다. "그럼 너만의 경계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네가 감정을 느끼는 건 특별한 능력이지만, 그 감정들이 너의 삶을 삼키지 않게 해야 해. 엠패스로서 중요한 건, 스스로의 에너지를 보호하는 거야. 네가 더 강해지려면, 타인에게 온전히 공감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해."


윤재는 엠마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왜 중요한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건 내 감정을 정리하고, 그 에너지를 되찾기 위해서였나 봐."


엠마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만의 시간은 너에게 중요한 재충전의 순간이야. 자연 속에서 명상을 하거나, 조용히 사색을 즐기면서 너 자신을 다시 찾는 게 필요해. 그걸 통해 너는 감정적으로 더 단단해질 거야."


윤재는 다소 놀란 듯 엠마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사업가로서 내 위치와 이런 감정 능력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어내고, 그에 따라 내가 영향받는다는 게 나약해 보일 때도 있었거든. 그런데 이게 단점이 아니라 나만의 힘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엠마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이지. 네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야. 이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의 본질은 공감이거든. 너의 엠패스적 능력은 타인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감정적 경계를 지키면서도 사람들에게 더 진정성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거지."


윤재는 엠마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그동안은 타인의 감정을 짐처럼 여겼던 것 같아. 하지만 이걸 통해 그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줄 수 있다면, 이제는 이 능력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해. 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면서, 그걸 나만의 방식으로 잘 활용해보고 싶어."


엠마는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윤재. 제로의 시대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있어. 너는 엠패스적인 능력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에너지를 깊이 이해하며 세상에 필요한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을 거야. 이 시대의 리더는 감정적 지능과 공감력을 지닌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그 자리에 네가 있을 거야."


윤재는 엠마의 말을 듣고, 가슴 깊이 희망과 자신감을 품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가진 엠패스적 능력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구별하면서도, 이 능력을 통해 더욱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나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윤재는 엠마와 대화를 나눈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상이 천천히 변화해 온 과정을 떠올렸다. 의료와 과학, 그리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제는 기억과 의식까지도 다루는 기술이 도입되었다. 그는 이런 시대의 첫 세대이자,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엠마가 그의 곁에서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윤재, 요즘 들어 기억이나 감정이 자꾸 어딘가에서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않아?"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가끔 그래.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자꾸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어. 감정도 어딘가 멈춘 듯하고, 마치 한 사람으로서의 윤재라는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아."


엠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 모두가 겪는 일일지도 몰라. 이 새로운 시대에서 의식과 기억은 더 이상 단순히 개인의 소유가 아니야. 기억을 조작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했으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정한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건 아닐까?"


윤재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맞아, 엠마. 기술이 너무나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 이젠 인간의 감정과 기억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시대가 왔지. 그런 점에서 엠패스적인 능력도 더 의미를 갖게 되는 것 같아. 하지만 내가 감정과 기억을 그대로 느끼고 소화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일부를 걸러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엠마는 윤재의 말을 듣고 미소 지었다. "네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지키고 싶기 때문일 거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과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아. 그들은 그것들을 보정하고 편집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경험을 재구성하려고 하지. 하지만 윤재, 넌 엠패스로서 남들보다 더 진실하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 너의 감각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을 거야."


윤재는 엠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일이라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어. 감정과 기억을 보정하거나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기억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말이야."


엠마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린 다른 사람들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기억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거야. 제로의 시대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리더는 바로 너처럼 감정의 진실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해."


윤재는 엠마의 말을 들으며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감정과 기억이 흐릿해지고, 누구나 원하는 기억만을 남기는 시대에 자신은 엠패스로서의 진실성을 잃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진정한 감정과 기억을 유지하며, 사람들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나가고자 했다.


이후, 윤재는 스스로의 감정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며, 필요한 순간에는 단호히 경계를 세웠다. 그는 엠패스로서 감정의 진실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작가의 이전글 [ 제로의 시대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