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 제로의 시대 ]
Z-36 제로 지대
by
FortelinaAurea Lee레아
Nov 23. 2024
엠마는 칼바도스의 향이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방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단호했지만, 마음속에는 혜원의 말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상상 속에 살고 있는 거 아닐까?”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엠마의 삶과 신념을 뒤흔드는 행위였다. 그녀는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실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카이와 혜원의 대화를 들으며 그녀는 알 수 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카이는 혜원의 말에 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혜원이 적은 글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는 존재라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는 그 문장이 자신을 향한 질문이라고 느꼈다.
“혜원, 그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
“모르겠어.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몰라. 카이, 넌 왜 태어났다고 생각해?”
카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부모도, 자연도 아닌 과학이 만든 존재였다. 그에게는 인간을 초월한 능력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삶의 이유를 대신하지 못했다. 그는 혜원을 응시하며 물었다.
“혜원, 네가 말하는 ‘제로의 시대’는 무슨 뜻이야?”
“제로라는 건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 같아. 모든 게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모든 게 태어나는 것.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상태.”
다음 날, 엠마는 혜원과 카이를 찾아왔다. 그녀는 손에 오래된 지도를 들고 있었다.
“이걸 봐. 여기에 자연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이 있어. 우리가 답을 찾으려면 여길 가야 해.”
혜원은 지도 위의 낯선 지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어디야?”
“구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장소야. 오래전엔 ‘제로 지대’라고 불렸어.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공간이지.”
카이는 엠마의 눈빛에서 확신과 두려움을 동시에 읽었다. 그곳이야말로 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엠마는 이 여행이 단지 기술의 한계를 실험하려는 목적으로 끝나지 않길 바랐다.
혜원, 카이, 그리고 엠마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제로 지대는 거대한 사막과 숲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그곳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장소였다.
여행 중 혜원은 자신의 내면의 두 늑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안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어.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 네가 알다시피 난 선한 늑대에게 먹이를 주기로 결심했어.”
엠마는 잠시 멈춰 섰다.
“선과 악이 그렇게 단순할까? 나는 모든 것이 그저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카이는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자신의 입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혜원이 말한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의 싸움이 자신에게도 존재한다고 느꼈다. 그의 능력은 사람을 구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었다.
며칠 후, 그들은 마침내 제로 지대에 도착했다. 그곳은 황량했지만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초목이 자라나지 않는 황무지 사이로 녹슬고 낡은 기계들이 흩어져 있었다. 엠마는 기계에 손을 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기술이 자연을 거스르다 실패한 곳이야. 이게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지 봐야 해.”
카이는 그곳에서 이상한 공명을 느꼈다. 땅에서부터 몸으로 스며드는 진동. 그는 눈을 감고 땅에 손을 댔다. 그 순간, 그의 기억 속에 없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마치 그 땅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혜원은 카이의 반응을 지켜보며 물었다.
“카이, 뭘 느끼고 있어?”
카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이곳이 나를 불렀어. 내가 여기 올 운명이었던 것 같아.”
제로 지대에서 그들은 각자의 이유와 목적을 다시 돌아보았다. 엠마는 자연의 방식만이 답이 아니란 것을, 혜원은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조화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카이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정체성이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다.
이제 그들의 여정은 단순한 탐험이 아니라, 제로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선언이 되고 있었다.
keyword
엠마
제로
카이
6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새 댓글을 쓸 수 없는 글입니다.
FortelinaAurea Lee레아
그냥... 그냥... 그냥... 딱히 뭐라고... 그냥... 마음표현.
구독자
293
제안하기
구독
작가의 이전글
[ 제로의 시대 ]
[ 제로의 시대 ]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