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플릭시아의 조각들]

36. 무無의 발자국들

by FortelinaAurea Lee레아

36. 무無의 발자국들


플릭시아에는 길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길은 걷는 자가 지나간 자리에서만 잠깐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발자국’이다.


이 발자국은 모양도 소리도 없다. 다만, 감각에 닿는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어떤 길 위에서 문득 마음이 떨릴 때, 그것은 누군가 그 자리를 지나갔다는 증거였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사람들, 존재했으나 흔적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생들.

그들이 남긴 무無의 발자국이 플릭시아의 땅을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나는 어떤 꿈에서 그 발자국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 길은 점점 어두워졌고, 세상의 소리들이 하나씩 꺼져갔다.

마지막엔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건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남긴 순간이었다.

존재하지 않기 위해 버텨왔던 나의 시간이, 조용히 존재를 주장한 순간.


플릭시아는 존재와 부재 사이의 틈에서 흔들린다.

그리고 그 사이, 아무도 보지 못한 채 걷는 발자국들—그것들이 이 세계를 지탱한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혁명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 밤 상현달이 뜨는 날에 무無의 발자국들이

그것을 옮겨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이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이전 29화[또다시 플릭시아의 조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