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문화콘텐츠
스타덤과 팬덤이라고 하면 하나는 우월해 보이고 하나는 그에 조금 못 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왕과 백성도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 정신과 육체, 명품가방과 싸구려 가방. 언급한 대립쌍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서로 우열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데리다는 이런 식으로 개념들을 대립적으로 짝 지어 놓고 하나는 우월한 것으로 하나는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는 현상을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립쌍의 관계는 '대리 보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리 보충적이라는 말은 서로가 없이는 제대로 된 의미를 발현하지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뜻한다.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개념들은 서로가 없이는 제대로 된 의미를 발현하지 못한다. 팬덤이 없으면 스타덤은 존재할 수 없고 백성이 없으면 왕이 존재할 수 없으며 땅이 없는 하늘 또한 상상할 수 없다. 정신과 육체, 명품가방과 싸구려 가방도 마찬가지다. 싸구려 가방이 존재하지 않으면 명품가방의 가치는 떨어진다.
팬덤 없이 스타덤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스타덤 없이 팬덤도 존재할 수 없다. 팬덤은 '무언가'를 좋아해야만 하고 스타덤은 '무언가'가 좋아해야만 한다. 그것이 아주 고전적이고 본질적인 스타덤과 팬덤의 속성이다. 지금부터는 하나씩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문화산업의 스타 시스템
고대로부터 대중에게는 항상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 필요했으나 그 대척점에는 항상 권력자가 서 있었다. 근대 합리적 이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권력은 단순했다. 신의 편에 선 성직자와 왕의 편에 선 귀족들이 사실 상 전부였다. 그러나 근대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낸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탄생시켰고, 사회는 돈이면 다 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갔다.
스타덤 역시 자본주의를 떼 놓고는 말할 수 없는 개념이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영화는 사실 감독의 어떤 고결한 예술 정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바로 당신의 욕망을 분석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그것을 자극할 수 있도록 기획된 하나의 장치다. 문화산업은 예술가의 작업실보다는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더 가깝다. 좋은 문화콘텐츠란 창작자의 혼이 깃든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작자에게 있어서는 그로 인해 벌어들인 수익이야말로 문화콘텐츠의 존재 가치다.
때문에 좋은 스타 시스템이란 좋은 공장과도 같다. 양질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 대중에게서 가장 많은 돈을 가져올 수 있도록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대상을 등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스타덤은 훨씬 더 팬덤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의 내재적 동기
스타덤이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것과 달리 팬이 되는 것은 인간적인 현상이다. 팬덤의 존재 자체는 과거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의 단편들을 형성하는 구조와 행위로 현대에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14세기에 쓰인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1000년 전의 일본 기이반도 이야기, 마저리 켐프의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팬픽션,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들의 소설은 오래전부터 팬덤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한다.
인간이 팬덤에 속하게 되는 이유는 본능적인 두 가지 욕망에 기인한다. 첫 번째는 외부의 존재(팬 대상)와 '연결'되려고 하는 욕망이다. 두 번째는 공동체에 '결속'되고 싶은 욕망이다. 우선 누군가 좋아하는 팬이어야 하고, 그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면 당신은 그 가수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마음(연결)과, 그 가수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유대감(결속)을 느낄 것이다. 오래 전의 팬덤에서부터 시간이 흘러 여러 환경이 변해왔지만 팬덤의 근본적인 두 가지 욕망은 변하지 않았다. 과거의 팬과 현대의 팬이 팬덤에 참여하게 되는 동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스타덤은 팬덤이 자신에게 돈을 지불하기를 원하고, 팬덤은 스타덤으로부터 정서적 만족감을 얻기를 원한다. 자연스럽게 스타덤은 팬덤이 만족할만한 행위를 하고, 팬덤은 스타덤에 돈을 지불한다.
팬덤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연결'의 동기와 '결속'의 동기로 이루어져 있다. '연결'의 동기는 팬이 스타에게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고 '결속'의 동기는 팬이 다른 팬에게 갖는 유대감이다. 팬덤은 '연결'의 동기로 인해 스타덤에 돈을 지불하지만, 진정한 팬덤의 힘은 '결속'의 동기에 있다.
'결속'의 동기의 힘이란 정말로 어마 무시하다. 결속력이 강한 팬덤은 스타덤에 있어서 활동의 지침이 되기도 하고, 훌륭한 창작자나 기획자가 되기도 하며, 활동에 있어서 좋은 홍보 매체가 되기도 한다. 결속력 강한 팬덤의 이러한 기능들은 때로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발현한다.
어떻게 하면 '결속'의 동기를 자극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스타덤의 행위이다. 다만 '결속'의 동기에 있어서 스타덤의 행위는 일종의 신화적 특징을 띤다.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에 의하면 신화는 문화적 사회유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 사회의 신성한 신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제의적 행동, 도덕적 행위, 사회조직, 더 나아가 일상적인 행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것은 팬덤이라는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결속력이 강한 팬덤으로는 BTS의 팬덤 'A.R.M.Y'가 있다. 실제로 스타덤의 활동이 팬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BTS는 유니세프와 2017년 11월 1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자'는 뜻을 담은 'LOVE MYSELF' 캠페인과 함께 유니세프의 아동 폭력 근절 캠페인 '#Endviolence'를 후원했다. 후원 방식은 BTS의 수익 일정 부분을 자동 기부하는 식이다.
당시 소속사인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와 BTS는 '러브 마이 셀프' 펀드를 만들어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우선 5억을 기부하고, 2019년 11월까지 'LOVE YOURSELF' 시리즈 앨범의 음반 판매 수익의 3%, 캠페인 공식 굿즈 판매 수익 전액 등을 기부하기로 했다. 팬들이 BTS에 돈을 쓰면 기부에 참여하는 구조다. 이 기금은 가정, 학교 폭력,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전 세계 아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누적 기부금은 24억 원이 넘었다. 이중 7억 원은 BTS의 전 세계 팬클럽 아미(Army)가 기부한 몫이다.
국내를 넘어서 전 세계적 규모인 데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2년 간 지속해서 기금을 모은 것이다. 이때 스타덤의 활동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기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행위의 동기가 그러하였더라도 실제로 BTS의 활동은 팬덤에게 신화적으로 기능하여 팬덤의 도덕적 행위를 촉발했다. 문화적 사회유지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스타덤과 팬덤의 사이에는 신화가 위치한다. 그리고 신화는 자본의 논리를 문화적 사회유지 기능으로 탈바꿈시킨다.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현대의 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