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병한 Mar 26. 2020

왜 원형(Archetype)인가?

문화콘텐츠와 원형 개념의 탄생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당신이 여가시간에 즐기는 영화, 드라마, 게임, 애니메이션이 모두 사라졌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즐길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어느 빈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다. 문이 하나 있지만 잠겨 있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면 편안한 휴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말이다.


이내 지루해질 것이다. 무언가 시간을 보낼 만한 것이 없는지 찾아보게 될 것이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길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더는 떠올릴 만한 일이 없을 테고 당신은 우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굳게 잠긴 문이 답답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공간으로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문은 다시 잠긴다. 당신은 조금 경계하겠지만, 이내 그 사람도 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경계심을 허문다. 당신은 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한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에 대해 질문한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거에 있었던 일과 그 일을 겪으면서 느꼈던 것을 말하고, 공감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울함이 덜어진 듯하다. 여전히 문은 잠겨 있지만, 그다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이야기하는 습성이 있다. 이야기를 통해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며 내적 결핍을 해소시킨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현생 인류를 호모 나랜스(Homo Narrans)라고 부른다.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호모 나랜스는 현대에 와서 갑자기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그 증거를 고대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화는 수메르 신화이다. 그중 유명한 서사시로, <길가메시 서사시>가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2000년에 기록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웅 서사시이다.


사실 기원전 2000년이라고 하면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러니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먼저 지금으로부터 예수가 탄생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익숙한 우리의 역사를 따라 가보자.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고려시대, 후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까지. 멀리도 왔다. 이 지점에서 지금까지 거슬러 올라온 시간만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된 시기가 된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시기쯤 된다. 그야말로 옛날이야기인 것이다.


길가메시는 신과 인간의 교혼(交婚)으로 탄생하였고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외모와 엄청난 힘, 용기가 있었다. 두려울 것이 없었던 길가메시는 타인을 괴롭히고 다니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길가메시의 횡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남성들은 길가메시의 노예가 되었고, 여성들은 반드시 첫날밤을 길가메시와 치러야만 했다. 원성은 점점 더 커져갔고, 신들은 야수 엔키두를 창조하여 길가메시를 제압하려 하였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결투를 벌이지만 아무리 오래 싸워도 결판이 나지 않았고, 둘은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리며 화해했다. 곧바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함께 모험을 떠났다.


길가메시(우)와 엔키두(좌)


그들은 수많은 모험을 함께했다. 북쪽 숲의 괴물 훔바바를 함께 제압하기도 했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천상의 황소를 막아내기도 했다. 신들은 커져가는 그들의 힘에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심 끝에 엔키두를 죽여버렸다. 이에 길가메시는 슬픔에 빠졌다.


둘도 없는 친구를 잃은 길가메시는 인생을 덧없음을 깨달았다. 생명의 유한함을 알게 되자, 이내 죽음의 공포를 직면했다. 두려움에 떨던 길가메시는 영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영원히 죽지 않는 자, 우트나피시팀을 찾아갔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일주일 동안 잠들지 않으면 영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우트나피시팀을 찾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길가메시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꿈뻑꿈뻑 눈을 감더니 7일 동안 내리 숙면을 취해버렸다. 잠에서 깨어난 길가메시는 허탈했다.


그러나 우트나피시팀의 아내는 그를 가엾게 여겼고, 아내의 부탁으로 우트나피시팀은 그에게 영생의 약초를 건네줬다. 길가메시는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던 길에 길가메시는 또다시 단잠에 빠진다. 일주일을 내리 자고도 잠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가 잠에든 사이, 뱀이 나타나 영생의 약초를 훔쳐 달아난다. 잠에서 깬 길가메시는 망연자실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이야기를 돌에 새기고는 잠에 빠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신화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길가메시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젊은 날에는 자신만만하여 치기 어리게 행동하다 친구를 만나고,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면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내 친구를 잃어버리고, 영원을 갈망하다 죽음에 이른다.


오래된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 준다.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바뀌어도, 어떤 환경 속에 놓이더라도 인간의 삶에는 보편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기 이전의 세상에서도, 핵무기가 개발되고 4차 산업혁명이 몰아닥치는 지금의 세상에서도 인간의 삶은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눈ㆍ코ㆍ입ㆍ귀ㆍ피부로 느껴지는 외부 세계에는 분명 변화가 일어났지만, 내면세계에는 그다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원형(Archetype)이라 이름 붙였다.


원형은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구성 요소이면서 이야기를 이루는 중요한 단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인간이 바라본 세상을 담아낸 것이기 때문에, 원형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원형을 연구해왔다. 학계에서 원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① 원형(原形, Originality)

② 원형(原型, Pattern)

③ 원형(元型, Archetype)     


첫 번째 원형(原形, Originality)은 민족성, 지역성의 성격을 가진다. 주로 특정 지역 문화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다른 민족, 다른 문화권과 구분되는 고유한 특성을 말한다.


“한류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그것은 우리 문화 원형(原形)의 우수함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럴싸해 보이고, 애국심을 자극한다.


예전에 그런 광고가 있었다. 장엄한 음악, 어두운 톤의 화면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자막이 등장하는 것이다.     

“국민의 90%가 국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

“세계 빈곤 국가 중 하나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나라”

“기름범벅이 된 바다를 위해 10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달려가는 나라”

“반세기 만에 GDP를 750배 성장시킨 나라”

“700만이 광장에 모여도 단 한 번의 사고도 없던 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은 해낸 나라”

“ONLY ONE KOREA”


원형(原形)의 관점을 견지해보면 이 광고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전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나라”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싸이, BTS, <기생충>이 등장하면 좋겠다. 상상해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이 개념은 자칫 자국 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으며, 내적인 모순을 품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BTS, <기생충>이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가 우수한 것이라면, 한류의 주류는 한복ㆍ사물놀이ㆍ판소리가 되어야 한다. 고유한 ‘한국 문화’란 전통문화를 말한다. 우리가 향유하는 현대의 한국 문화는 한국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다. 강남스타일을 만든 싸이는 한국인이지만 곡을 구성하는 멜로디, 랩 따위는 한국 고유의 문화라고 보기 어렵다. BTS, <기생충>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세계 보편의 문화를 담아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원형(原形)에 대한 강조는 무언가 자부심이 느껴지지만, 모순적이다.     


두 번째 원형(原型, Pattern)은 산업적 목적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영화 <아이언맨>의 원형은 마블 코믹스야.” 따위로 사용된다. 문화콘텐츠는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산업이다. 대중이 그것을 경험해보아야지만 대중이 그것을 좋아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수요의 예측이 어려운 것이다. 그로 인해 OSMU(One Source Multi Use) 전략이 등장하였다. 대중적으로 검증된 원 소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때 원소스의 동의어가 원형(原型)이다. OSMU 전략에는 세부적으로 창구효과, 장르전환, 상품화 전략이 있다.


창구효과는 여러 미디어를 거쳐 콘텐츠가 향유되도록 미디어 간 유통 시기를 조절하는 전략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할 때는 OTT 플랫폼에서 서비스를 하지 않다가, 상영이 종료된 이후 OTT 플랫폼에서 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창구효과는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집행할 수 있는 전략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전략이다. 고정적인 수익을 만들어내지만 보통의 경우 첫 번째 창구의 흥행 실적을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그에 반해 장르전환은 상대적으로 비싸고, 위험하지만, 성공 시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이다. 핵심은 대중성이 검증되었거나 잠재력을 갖춘 원천 콘텐츠를 선정하여, 상당한 규모의 흥행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르의 거점 콘텐츠로 전환하는 것이다. 웹툰 <신과 함께>가 영화 <신과 함께>로 전환되어 엄청난 흥행을 거두고, 이후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웹툰 <신과 함께>는 원천 콘텐츠, 영화 <신과 함께>는 거점 콘텐츠가 된다. 이후 뮤지컬, 애니메이션 또한 거점 콘텐츠라고 칭한다.


상품화는 원 소스에 드러난 미시콘텐츠를 상품으로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미시콘텐츠는 소비자의 니즈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예컨대, 마블 스튜디오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팬을 타겟으로 히어로의 슈트를 제작하여 판매한다던지, 영화의 프렐류드 서적을 만들어 판매하는 행위가 상품화 전략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OSMU 전략이 상정하는 모든 원소스의 구성요소는 앞서 언급한 원형(原型, Pattern)에 해당한다.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재료가 되는 미완의 상태, 원천소스인 것이다.


이 개념은 콘텐츠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논의하는데 아주 중요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무언가 원본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원형(原型)의 논리로 모든 콘텐츠가 제작된다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창조될 수 없다.


세 번째 원형(元型, Archetype)은 인간 세상의 근본 질서와 운행 원리를 의미한다. 앞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도 찾아본 보편적인 구성요소인 것이다.


이 세 번째 원형(元型)은 눈에 보이는 원본을 상정하거나, 민족적 고유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자각하지 못한 채 행하고 있는 관념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로서, 인류의 보편적 질서를 의미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에게 항상 내재되어 왔던 특성인 것이다. 이야기의 비밀을 파헤치기에 가장 적절한 개념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원형(Archetype)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다음 글에서 함께 파헤쳐보자.

작가의 이전글 문화콘텐츠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관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