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와 원형 개념의 탄생
처음으로 원형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을 정리한 사람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이루는 구성 요소로 원형을 언급하였으며, 원형은 인지되지 않는 무의식의 층위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융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자.
칼 구스타브 융은 1875년 스위스 북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스위스 바젤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프로이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32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융은 50대에 접어든 프로이트와 만나자마자 13시간에 걸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것이다. 이후 융은 프로이트와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프로이트는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융이 생각하기에는 프로이트가 과도하게 성욕에 치우쳐 무의식을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융이 과도하다고 생각했던 프로이트의 이론에는 유아성욕론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다.
① 유아성욕론: 갓 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성욕을 느끼는 것
②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적대시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
유아성욕론은 갓 난 아기가 본능적으로 성욕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는 1905년 《성욕의 이론에 관한 세 개의 에세이》라는 책을 통하여 성적인 욕구가 2차 성징 이후에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유아기에도 존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보았다. 유아와 성을 연관 짓는 것 자체를 불쾌해하는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당시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신화로부터 도출된 개념으로, 남자아이에게는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원초적 욕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아이는 욕망의 실현이 아버지의 제재(거세의 위협)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도전하기보다는 아버지와 동일시하여 그의 규율에 복종하며,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이성에게로 관심을 옮기게 된다. 프로이트는 인류 문화 초창기에 실제로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원초적 경험이 있었다고 보고, 이것이 토템 집단에 존재하는 두 가지 금기 즉 토템 동물을 살해하거나 먹지 못하며, 같은 토템 집단에 속하는 여자들과는 혼인할 수 없다는 금기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와 융의 견해 차이는 종종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을 통해 이해되고는 한다.
프로이트의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차이는 20살이었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두 번의 이별을 겪고, 세 번째 결혼을 통해 프로이트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로 인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프로이트의 어머니와 동갑인, 기이한 형태의 가족 구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태어나보니 형이 어머니와 동갑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보다 이복형이 부부로서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린 프로이트가 아닌 누가 봐도 그랬을 것이다. 또 자신을 키워 준 보모가 있었는데, 연령대가 아버지와 비슷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늙은 보모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프로이트를 낳은 뒤, 남동생을 낳지만 그는 이내 사망하고, 다섯 딸을 낳은 이후 프로이트와 10살 터울의 아들을 낳게 된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가 자신의 어머니와 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처럼 특별한 프로이트의 성장 과정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생각해내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반면 융은 목사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앓는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융이 막 태어났을 무렵, 어머니는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유아기의 융은 어머니와 분리된 상태에서 자라게 된다. 오히려 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융은 자신의 성장 과정에 비추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 과정을 통해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는 방식은 성년 이후의 사고와 경험, 주체적 선택을 간과하기에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융은 성욕을 벗어나 좀 더 넓은 영역에서 연구를 이어나갈 것을 프로이트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를 거부했다. 유아성욕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곧이어 융은 정신분석학회를 탈퇴하고, 분석심리학회를 만들게 된다.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사상에 반대하여 만들었지만, 다음 정신분석학의 전제를 공유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는 지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빙산에 비유하였다. 물 표면에 떠있는 작은 부분을 의식, 물속에 잠겨 있는 큰 부분을 무의식, 물결처럼 표면으로 나타났다 잠겼다 하는 부분을 전의식으로 보았다.
① 의식: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드러나 있는 영역
② 전의식: 인지할 수 없지만 의식에 접근 가능한 영역
③ 무의식: 인지할 수 없는 본능과 좌절되고 억압된 욕망의 저장고
빙산은 물 표면보다 물속에서 더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 가라지 않고 물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력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 표면에 있는 얼음이 떠 있기 위해서는 물속에 많은 얼음을 필요로 한다. 프로이트가 의식과 무의식을 빙산에 비유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인간의 의식 세계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다.
융은 이러한 프로이트의 생각에 동의했다. 인간의 정신이 의식, 전의식, 무의식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대부분 성적 욕망과 연관 짓는 프로이트의 사상은 도무지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던 융은 편집증을 앓고 있는 남자 환자가 환상을 묘사하는 것을 듣게 된다. 환자는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태양의 음경이 보인다고 하였다. 프로이트적으로 해석한다면, 아마도 남자에게는 남성성과 관련된 성적 결핍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융은 4년 뒤 신화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고대 《헤르메스 총서》에 나온 내용 중에 환자가 묘사했던 환상과 같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태양신 미트라스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태양에 긴 관이 달려있고 그 관에는 바람을 생산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러니까 편집증을 앓던 환자는 자신의 고개를 돌라 관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을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양에 매달린 관’이 바람을 만들어낸다는 관념은 중세 <수태고지>에서도 드러난다. <수태고지>는 중세 기독교 미술의 주제로, 하느님의 사자인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음을 알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신의 왕좌로부터 관이 드리워지며 바람을 타고 비둘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융은 의아했다. 편집증을 앓던 남자에게는 이와 비슷한 개인적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융은 ‘원형(archetype)’을 착안하게 된다. 집단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공통의 요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원형이란 집단 무의식을 구성하는 공통의 요소를 말한다. 우선 무의식에 대한 쉬운 이해를 위해 예시를 준비했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숲이다. 방아깨비 한 마리가 수풀 위에 앉아 있다. 방아깨비는 우거진 잡초를 뜯어먹고는, 수풀 위를 뛰어다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때 방아깨비 위로 불운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배고픈 새가 방아깨비를 발견한 것이다. 방아깨비 또한 그림자를 보고 새가 근처에 왔음을 알아차렸다. 이때 방아깨비는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수풀 속에 그대로 앉아 지나온 삶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리운 어머니를 떠올리고, 사랑했던 방아깨비들을 떠올린다. 또 눈 앞에 펼쳐진 녹음의 아름다움을 잠시 감상한다. 이내 온몸이 바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방아깨비는 숨을 거둘 것이다. 두 번째는 수풀 아래로 뛰어내린 뒤 이리저리 이동하며 위치를 숨기는 것이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첫 번째 방법보다는 훨씬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실제로 모든 방아깨비는 새가 근처에 오면 수풀 속으로 숨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무도 방아깨비에게 수풀 속으로 숨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아깨비는 사람이 아닌 곤충이기에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두 번째 방법을 택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순간에 방아깨비는 두 번째 방법을 택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겠으나, 그 경험을 가진 방아깨비는 모두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두고, 방아깨비에게 ‘새의 그림자를 발견하면 수풀 아래로 뛰어내리는’ 무의식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방아깨비 사이에 공포의 새 그림자와 관련된 신화가 존재할지는 의문이지만, 새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공통의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융은 무의식을 본능과 원형으로 구분하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의 예시는 원형보다는 본능에 가깝다. 본능은 충동으로 드러나는 행동적 부분, 원형은 신화적 표상이다. 만약 방아깨비에게 공포의 새 그림자와 관련된 신화가 있다면, 이를 원형이라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이야기하기’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성이기에 동물에게 원형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의식에 원형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개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 체계와 그것을 고안해내고 사용할 수 있는 지적 수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형은 신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도록 한 결정적 요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동물에게도 고도의 의사소통 체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원형을 통해 신화를 만들어낸 것일까? 융은 신화의 탄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원시 정신 상태는 신화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한다. 신화는 의식 이전의 심혼이 그 자체로 드러낸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심혼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진술이며, 물리적 사건들의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러한 알레고리라면 비학문적인 지성이 행하는 한가한 놀이일 것이다. 그에 반해 신화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화는 스스로 나타낼 뿐 아니라 신화적인 조상의 자산을 잃어버리면 마치 인간이 자신의 심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곧 파멸되고 마는 원시 종족의 영역인 삶에 해당한다.
…중략…
이런 수많은 무의식적 사건들은 의식의 동기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나, 결코 의식적 자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적 과정의 대부분의 것들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산된다. 즉 인식하거나 의식 속에서 뚜렷한 원인 없이 생겨난다.
이유경, 《원형과 신화》, 분석심리학연구소, 2008, p.106 참조.
여기서 알레고리란 비유를 뜻한다. A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B를 말하고 A와 B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다. 위 글에서 ‘물리적 사건들의 알레고리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원형이 물리적 사건을 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수많은 무의식적 사건들은 의식의 동기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나, 결코 의식적 자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문장을 통해 신화가 무의식적인 체험임을 말한다. 신화의 탄생 과정에 이성이 개입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신비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신화의 탄생 과정은 고대 인류의 신비한 원시 정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융은 1958년 <현대의 신화>라는 논문에서 하나의 원형적 현상이 현대의 신화를 이루고 있음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바로 UFO다.
UFO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스웨덴 상공에서 처음 등장한 뒤, 세계 여러 곳에서 출현을 보고하고 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무엇인가 관측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언급한다. 여러 사람이 목격하였음에도 그것이 무언인지 설명할 방법이 없자, 풍문이 만들어진다. 외계인이 타고 온 비행접시라는 것이다. 풍문은 점점 더 구체화된다. 외계 생명체는 주기적으로 지구를 감시하고 있으며, 때로는 개입하기도 하는데 그 증서가 피라미드의 벽화에 그려져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결과적으로 지구 밖 외계인의 침입이라는 신화적 모티브가 만들어진 것이다. 융은 비확인 비행물체에 대한 풍문이 현대의 신화를 만든 원동력임을 설명한다.
외계인 침입 모티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서 커다란 문화적 풍요를 가져왔다. 바로 <스타워즈>를 비롯한 SF영화다. UFO를 통한 외계인 침입 모티브가 없었다면 외계인이 등장하는 지금의 SF영화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스타워즈> 뿐만 아니다. 외계인이 존재하는 멀티버스를 전제로 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원형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원형을 충분히 알 수 있다면, 더욱 풍부한 이야기ㆍ풍요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