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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호 Aug 25. 2019

애덤스미스의 도덕적 감정

<도덕감정론을 읽고>

1. 들어가는 말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사회라는 조직이 구성되면서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관계 속에서 요구된다. 모두가 법과 같은 구체적인 항목이 없더라도 인간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며 옳은 것을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 도덕적 당위성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수많은 견해와 이론을 만들어낸다.

    어떤 부류는 인간의 이성에서 주체성을 찾으며 이성의 명령으로부터 도덕의 당위성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칸트는 그의 이성이 명령하는 정언명령에 의해, 레비나스는 무한명령에 의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부류는 이익창출이 도덕적 당위성을 결정한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밀과 벤담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이 그렇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조건만 일치한다면 그 모든 것은 도덕적으로 옳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인간의 감정에 도덕적 당위성을 두는 부류이다. 오랜 시기 감정은 이성에 의해 억압된 대상이었다. 그런 정황에서 감정에 도덕의 당위성을 두는 시도는 굉장히 낯선 이론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감성의 작용에 도덕적 근거를 둔다. 어떤 이는 인애라는 이타심에 두며, 누구는 도덕적 관능, 직관에 둔다.

   애덤스미스도 이와 같이 감정에서 도덕의 근원을 찾는다. 우리는 그의 저서<도덕적 감정: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통해 그가 말하고 있는 도덕적 감정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감정이 사회에서 어떻게 발현되며, 그것으로 희망하는 이상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것이다.  


2. 도덕적 감정의 근원


     애덤스미스에게 있어서 도덕의 원천은 감정이다. 특별히 사회라는 조직 속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와 관계를 하며 살고 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감정이 있다. 바로 동감(動感)이다.   애덤스미스는 관계형성에 이 동감을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하며 도덕적인 판단을 일으키는 근원으로 판단한다.

     동감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타인의 운명에 대한 관심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통해 자신도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타인이 느끼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고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상상을 통해서 우리가 유사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느끼게 될지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오로지 상상을 통해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한다. 상상을 통해 우리 자신을 타인이 처한 상황에 놓고 우리 자신이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상상한다.  


    예를 들어 고통이라는 감정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마치 우리가 타인의 몸속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그와 동일인이 되고, 그럼으로써 타인의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며, 그 정도는 타인보다 약할지라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동류의식(同類意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상을 통해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받는 자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거나 또는 그가 느끼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통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을 보며 느끼는 희열,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고 느끼는 분개, 그리고 고난 받는 삶을 볼 때 느끼는 연민과 동정 등 모두가 동류의식을 나타내는 동감의 결과물들이다.

     동감은 타인의 감정을 보는 것만으로 온전하지 않다. 타인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동감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격정의 모습을 보았을 때, 특별히 분개나 극한의 슬픔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런 타인에게 곧바로 동감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분개나 슬픔에 대한 부정적 감각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동감은 격정을 목격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격정을 야기한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한다.

      동감에 대해서 정리하자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 능력에 기초한 행위자와 타인의 감정일치를 의미한다. 애덤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은 이 동감에 의해 도덕적인 기준을 세운다. 서로 동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하며 그것을 실천해나간다. 하지만 동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의 감정이 표출되며 상대방에 대해서 배척하기 시작한다. 즉 모든 존재는 타인의 격정원인과 격정의 결과에 대한 상상력으로 선악을 분별한다. 도덕적 당위성과 실천은 동감에 의한 긍정에서 시작되며 동감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배척당하고 거부당하며 비도덕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동감이 도덕적 기준이라면 이기적 행위도 정도에 따라 충분히 공감된다면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가 될 수 있다.


3. 도덕적 감정의 미덕


   동감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신과 타인이 불가피하게 존재하게 되며 행위자와 방관자가 존재하게 된다. 동감을 위해 행위자든, 방관자든 모두가 노력을 필요로 한다. 행위자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방관자는 행위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방관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위자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동감의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격차가 줄어들수록 행위자는 도덕적인 사람으로 방관자에게 긍정되며 상호동감의 즐거움을 느낀다. 동감의 즐거움을 주는 것은 서로가 도덕적인 옳음으로 판단하며 실천을 유발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해봐야할 단어는 ‘적정성’이다. 애덤스미스는 동감에 있어서 서로간의 노력으로 ‘적정성’을 지향해야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 동감의 적정성을 미덕으로 본다.

   애덤스미스에게 도덕적으로 가장 완미한자는 이런 사람이다. 타인에게 동감할 수 있는 감수성과 이기적인 욕심을 억제할 수 있는 통제력을 겸비한 사람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표출할 때에는 제어하고 억제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격정에는 뛰어난 감수성으로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미한 사람인 것이다. 인간은 행위자와 방관자라는 이중성을 동시적으로 가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행위자일 때의 노력과 방관자일 때의 노력을 조화롭게 갖추어나가야 한다. 행위자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방관자가 그것에 대해서 동감하며 자혜를 표출할 때 그 속에서 ‘적정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행위자든 방관자든 모두가 비애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본능적으로 저항하고 숨기려고 한다. 특별히 행위자는 비애라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한다. 그 이유는 행위자는 방관자가 비애라는 감정에 전적으로 동감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방관자는 행위자가 그 감정을 억제하고 제어하려는 모습, 애써 담담하려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감수성 없음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비애라는 격정 속에서 담담함을 느끼는 상대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행위자의 억제하려는 노력과 방관자의 감정이입의 노력은 적정한 조화를 이루게 되고 미덕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동감의 적정성이 관계마다 형성되며 도덕이 지켜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개인이 행위자일 때와 방관자일 때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우리는 방관자로서 타인에 대해서 자혜를 표출해야한다. 자혜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동감의 정도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애덤스미스는 자혜를 개인, 사회, 우주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개인에 대해서는 것과 같이 동감을 더욱 느낄 수 있는 사람을 향해 자혜를 더욱 많이 베푼다. 즉 가족, 친척과 같이 동감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자혜를 베풀 마음이 강한 반면 처음 보는 거리의 거지들에게는 안타까움과 불쌍하다는 마음은 느끼지만 저들을 향해 선뜻 선행을 베풀지 못한다. 사회의 영역, 특별히 국가 속에서 우리는 자혜를 베푼다. 그 이유는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한 국가와 문화 속에서 생기는 동류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공익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우주를 향한 자혜는 숭고함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이익과 쾌락과 즐거움을 넘어선 숭고한 뜻으로만 우주적 자혜는 가능하다. 개인에서부터 나아가 국가와 우주적인 동감의 범위, 감수성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은혜와 선행이 깊어질 것이다.

    두 번째 우리가 행위자로서 스스로에 대해서 억제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행위자로서 스스로에 대해서 억제하고 제어할 때에도 동감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스스로에 대해서 억제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떤 격정을 표출할 때 방관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동감의 정도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여기서 만들어낸 방관자의 입장은 자신의 방관자로서 입장일 때 형성된 기준이다. 내가 타인을 보는 동감의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방관자를 애덤스미스는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한다. 천연의 눈, 내부인간, 마음의 재판관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자신을 제어해주는 이상적인 인간을 표현한다. 이런 장치는 스스로에게 더욱 신중하게 하므로 타인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는 것을 억제한다.

     모든 인간은 도덕적 감정을 가진 존재로서 행위자와 방관자의 역할을 지닌다. 그 속에서 행위자일 때는 스스로 자기제어 하는 자세를, 방관자일 때에는 더욱 자혜로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동감하느냐, 타인에게 얼마나 동감하느냐 이것들이 서로간의 적정성을 이룰 때 미덕이 된다.

     

4. 도덕적 감정과 이상적인 사회


     모든 사회 속에서 이상으로 바라보는 두 가지 덕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애(사랑)와 정의이다. 애덤스미스도 사랑과 정의라는 두 가지를 중요시 생각한다. 애덤스미스는 타인이 공감할 만큼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인애라고 하며 방관자의 이기적 행위가 제한 억제되는 것을 정의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도 앞서 말한 적정성의 미덕이 적용된다.) 애덤스미스는 인애와 정의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설명하며 정의에 더 비중을 두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인애는 모든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 상대방에 대해서 공감하고 상대를 돕는 행위는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역할을 한다. 설령 그 은혜를 잊고 배신할지라도 배은망덕은 증오만 불러올 뿐이지 피해자를 양산하지는 않는다. 인애는 은혜로 인한 수익자는 있지만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기심의 경우는 다르다. 이기심은 자신의 욕망추구로 인해 타인의 생명, 신체, 재산, 명예 등에 침해를 발생시키기 쉽다. 정의의 덕은 피해자를 발생시키는 것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기심도 타인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범위에서 도덕적으로 인정되고 허용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선 이기심과 행위는 사회에 강력한 보복감정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분개이다. 분개는 정의감의 표출이다. 정의는 이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자에 대한 억제이다.

     여기에서 애덤스미스는 인애보다 정의에 더욱 무게를 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애는 사회의 존속을 위해 덜 중요하다. 인애가 없어도, 비록 살기에는 불편하겠지만, 사회는 존속할 수 있으나,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된다. 정의는 사회란 구축물을 지지하는 주된 기둥이다. 만일 기둥이 제거된다면 전 인간사회는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할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정의는 사회의 뼈대이고 인애는 사회의 장식품으로 생각한다. 정의는 피해자 발생을 억제시키는 덕목이며, 인애는 수익자를 발생시키는 덕목이다. 애덤스미스에게 이상적인 사회는 이기심은 절제하며 이타심은 확대해감으로 수익자를 최대한 발생시키는 사회이다. 여기에서도 도덕적으로 완미한 사람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적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동감의 정도를 넘어서버린 이기심은 방관자들에게 분개를 일으킨다. 동시에 행위자는 방관자들에게 연민을 유발하는 동시에 스스로 회한을 느낀다. 방관자들에 의해 분개의 대상이 되며 동감에서 소외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애덤스미스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정의의 덕을 침해하는 행위자는 비도덕하며 관계에서 단절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정의에 대한 인간의 도덕성을 어느 정도 낙관한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적정성을 유지하며 잘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그는 정의라는 사회의 뼈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므로 법률의 제시를 필요로 요청한다.

     

5. 나가는 말

     

    애덤스미스의 <도덕적 감정>을 통해 도덕의 당위성과 실천의 기준을 감성에서 찾아보았다. 인간이 가진 상상력, 감정이입은 동감이라는 능력을 부여한다. 동감은 인간에게 서로가 맞추어갈 기준을 제시해주며 서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해는 서로를 용납하게 하며 관용과 사랑의 덕목으로 발전한다.

     삶도, 도덕도, 동감도 모두 관계에서 발생한다. 애덤스미스는 동감의 적정성을 중요시하며 적정성 속에서 미덕을 발견한다. 행위자와 방관자라는 이중적인 형식 속에서 적정성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는 내부에 거울을 비추어 자신을 억제하며, 타인에게는 넘치는 감수성으로 동감하며 사랑을 베푸는 모습은 나와 타인의 동감의 격차를 최대한 줄인다.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형성되며 가장 완미한 도덕이 생겨난다.

     이 적정성은 개인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체계에서도 적용된다. 사랑과 정의라는 두 가지 덕목을 위해서 적정성이 요구된다. 사랑은 방관자들을 향한 자혜와 인애로 사회를 아름답게 장식해준다. 정의는 개인의 이기심을 동감의 범위 안에서 제어시키므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억제한다.

     사람의 삶이란 이성과 논리로 평가하기에 너무 다채롭고 다양하다. 모두가 올바른 논리를 세운다. 그 논리로 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비판하지만 스스로가 스스로의 논리 앞에 섰을 때 나약해지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논리로 다채로운 사람의 삶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동감이라는 키워드는 다채로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데 조금 더 나은 기준점을 제시해준다. 때론 이성보다 앞서가는 인간의 감정, 직관은 우리의 실질적인 삶과 행동과 실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인간의 천성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의식하며 서로를 느끼며 서로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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