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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바다 Aug 31. 2020

당신만큼 낮아지는 곳

화장실

그곳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유일한 공간.
그러니까 그곳은 최후의 도피처 같은 공간이었다. 


Pierre Bonnard,  <Nude in Bathtub>,  1946

욕조에 잠긴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팔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욕조에 잠겨 있다. 그녀 곁에 있는 강아지 때문일까, 길게 늘어진 팔다리 때문일까. 그녀는 느긋해 보인다. 화려한 색과 다양한 패턴의 타일에 둘러쌓인 그녀는 마치 꿈속에 머물 듯, 욕조 안에 잠겨 있다.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라 불리는 피에르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 그녀는 평생 동안 강박증, 결벽증, 심신증, 신경쇠약 등의 정신 질환을 앓았다. 그녀는 자주 목욕을 했고 욕조에 잠겨 있기를 좋아했다. “마르트는 섬세하고도 감각적인 손길로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비누 거품을 바르고, 몸을 문지르고, 마사지를 해야 작성이 풀렸다 … 그녀가 원한 유일한 사치는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욕실이었다.”라는 마르트 친지의 말처럼, 그녀에게 목욕은 단순히 씻는 행위를 넘는 특별한 의미의 일이었다. 아마 그녀에게 목욕한다는 것은 자신의 결벽과 강박을, 고통과 상처를 견디거나 위로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나르는 즐겨 그렸다. 그가 아내를 대상으로 그린 작품은 무려 385점에 달했고 그중 다수의 작품이 목욕하는 마르트의 그림이었다. 심지어 마르트가 죽고 나서 5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목욕하는 그녀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마르트를 그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마르트에게 욕실은 상처와 아픔을 견디며 위안을 얻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보나르에게 그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경험하고 창조하는 공간이었다. 보나르가 섬세하게 묘사한 욕실이 마치 빛이 투과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그녀와 그에게 욕실은 다른 곳 어디보다 가장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슬픔을 위로하고 상처를 보듬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간. 온전히 혼자서 그 상처와 슬픔 앞에 마주 서는 공간. 자신의 상처와 슬픔 아래 남몰래 밑줄 긋는 공간. 화장실은 그런 곳이다. 생리적인 욕구(desire)를 처리하는 장소를 넘어 심리적인 요구(need)를 처리하는 곳이다. 



*안바다 신작 에세이, <나와 당신의 작은 공항>  9월 출간 전 일부 내용을 사전 연재합니다.


*다음은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출간 알람 서비스입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07ZgYtLm3aKnQJUMzYSJwMYHQHM2oNBIDpoMlkYAosAeSsw/view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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