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난 언어들
안녕하세요, 위키입니다.
대통령선거 특집 방송이 나간지도 벌써 보름이 넘었습니다. 책임프로듀서부터 시작하여 문재인·홍준표·유승민·심상정(이상 기호 순)을 맡았던 패널들의 후기도 다 나갔고, 이제 저만 후기를 남기면 특집 방송은 완전히 끝이 납니다. 왜 안철수가 마지막이냐고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다만 제가 중간고사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또 게을렀던 탓입니다. 청자 여러분께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후기를 늦게 쓴 덕분에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선방을 했습니다.
지난 보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특집 방송을 기획하고 녹음할 때만 해도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은 30% 중반에 달했으며, 비록 논란은 있었지만 일부 설문조사에서는 문재인 후보를 앞서기도 했었습니다. 대통령 당선 기대감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련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부 상장 주식들도 몇 배 폭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 차례에 걸친 토론을 거치면서 또 부인 김미경 교수의 채용 의혹 등이 터지면서 안 후보의 지지율은 점차 떨어졌고 이제는 10%대 후반 20%대 수준입니다. 폭등했던 주식도 무섭게 폭락했습니다. 반면 홍준표 후보는 안똔이 예측했던대로 홍준표 후보의 지지율은 점차 올라와 2위를 다지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의 영향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또 전국 유권자의 4분의 1이―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3분의 1이―이미 투표를 한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와 그의 공약을 평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10%대 후반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당장 당선이 되지 못하더라도 안 후보는 당권(黨權)을 확보함과 동시에 차기 유력 대권 주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느 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이른바 헝 의회(Hung Parliament) 하에서 문재인과 홍준표 후보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국민의 당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안철수는 현 시점의 ‘주요 정치인’ 중 하나이고 그의 정책은 돌아오는 대통령 임기 중에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철수의 정책은 분산과 위탁으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중앙정치제도는 지금의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약간 섞여있는 대통령제를 개선하여 명실상부한 이원정부제로 바꾸며, 중앙과 지방의 관계에 있어서는 지방의 권한을 강화합니다. 또한 일자리를 비롯한 경제정책에 있어서 국가는 기업에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규제를 철폐해 줄 뿐, 실질적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등의 역할을 하는 것은 기업입니다. 교육도 비슷한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에서 도맡아 하였다면―비록 지역교육감은 직선제로 바뀌었지만 이들의 권한은 제한적입니다―, 안 후보의 구상에 따르면 정부로부터 독립된 시민사회가 주축되어 운영하는 기구에서 자율적으로 수행을 하게 됩니다. 그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부르주아란 서양근대사를 이끈 주체였던 제3계급 또는 시민을 뜻하기도 하고, 자본 또는 자본가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했던 사람이 가까운 과거에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입니다. 그는 ‘줄푸세 타고 747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선거에 임했습니다.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워서 연 경제 성장률 7%, 1인당 국민 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철수 후보도 비슷합니다.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을 하는 것은 사실상 세금을 줄여주는 것이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각종 지원을 하겠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규제를 풀겠다는 것이고,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고위공직자비위수사처 등을 세우겠다는 것은 법질서를 바로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명박과 안철수는 경력도 비슷합니다. 이명박은 대우건설에서 사장을 역임하여 일선 경영을 책임진 바 있고, 안철수는 벤처기업을 세워 운영했습니다. ‘기업인’ 또는 ‘자본가’의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안철수와 이명박이 같다거나 안철수가 당선되면 이명박이 했던 것과 같은 뻘짓 예컨대 4대강 사업 등을 반드시 벌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명박이 노골적으로 대기업 편을 들었다면 안철수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주로 생각하며 청년 취업 등에 관한한 노동자들도 조금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귀족노조 운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교육의 개혁을 시민사회의 숙의에 맡기겠다는 생각 또한 이명박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진일보한 태도입니다. 안철수는 분명 이명박보다 세련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철수가 과연 이명박과 비교하여 얼마나 차별화될 수 있을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 풍토나 노동환경이 10년 전과 비교하여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물론 최저임금이 조금 오르고 육아휴직을 과거보다는 덜 눈치보며 사용할 수 있고 전통시장과의 상생을 한다며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할인매장을 주말마다 강제로 쉬게 만드는 등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중심되어 1차 하청업체에 각종 비용을 전가하고 1차 하청업체는 그 아래의 2차·3차 하청업체에 떠넘기며 결국에는 노동자들에게 떠넘겨지는 다중 하청 관행, 시간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상의 노동조건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갑질 관행,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반(反) 조합 관행 등 근본적인 것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간에 경제 운영을 전적으로 맡긴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바뀔 수 있을까요? 예컨대 중소기업에 청년의 임금을 지원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대기업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자신들 입장에서는 이른바 가격 경쟁력을 강화한답시고 국가의 지원을 핑계대며 이전보다 훨씬 낮은 도급비를 줄 것입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일감 끊기지 않으려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이를 받을 것이고, 결국 청년들이 받는 임금의 액수는 크게 변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들이고 효과는 딱히 얻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대기업 보다 정확히는 재벌에 칼을 댈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는 재벌을 해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재벌 총수’들의 능력 발휘 문제를 운운하려는 것은 아니고, 억지로 떨어뜨려놓더라도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시 재벌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어찌되었든 시장지배력을 보유한 재벌에 칼을 대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현재 상황에서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는 민의에 따라서 선출된 국가 기구 즉 의회와 정부입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일을 할 강한 의회와 정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청자 그리고 독자 여러분의 몫이며 저는 어떠한 강제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참정의 권리가 있으며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권리가 포함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선택을 하기 전에 꼭 내가 평생을 살아갈 한국―혹시 탈조선을 하실거라면 상관이 없을수도 있습니다만―의 현실을 고려하여 적절한 후보를 골라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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