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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호 Jul 30. 2017

NL 학생운동사 2편 - NL의 전성기

NL의 탄생, 안똔이 쓰다.

http://www.podbbang.com/ch/13959?e=22341909


II. NL의 탄생     


NDR 노선의 후예 삼민투비판에 직면하다


  84년 시작된 C-N-P 논쟁, 또는 민주변혁논쟁에서 우세를 점했던 것은 NDR론이었습니다. NDR론은 남한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이 NDR론이 계승된 것이 삼민혁명론입니다. 그 내용은 신군부 파쇼체제가 지닌 속성은 삼반성, 즉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이며 따라서 민족운동, 민주운동, 민중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쇼체제의 반민족성이라 함은 곧 미국발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성입니다. 이 예속성에 대항하는 운동이 민족운동입니다. 다만 삼민혁명론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운동 역량은 반파쇼 민주전선으로 집결해야 합니다. 달리 말해 삼민혁명론 내 민족운동 또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위상은 파쇼체제에 대항하는 민주전선 전체의 타격지점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실천의 방법론을 토대로, 85년 당시 곳곳의 대학에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가 꾸려져 있었습니다.     


“해산 결정후 구호를 외치며 미문화원을 나오고 있는 학생들”(1985. 05. 25)Ⓒ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시기 두 사건이 일어납니다. 삼민투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IMF·IBRD 총회의 서울 개최입니다. 85년 5월 23일부터 사흘간 계속된 미문화원 점거 농성에서, 삼민투는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다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쨌든 남한이 미제에 예속되어 있다는 전제를 수용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우리는 반미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농성을 해제합니다.


  한편 IMF·IBRD 총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금융자본주의의 수뇌 회의입니다IMF와 IBRD는 각각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y Fund), 국제부흥개발은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인데, 2차 대전 이후 국제 무역을 증진하고 전후 복구 및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좌익에서는 IMF와 IBRD가 실질적으로 저개발 국가들을 세계 경제에 더 강력히 결합하도록 함으로써 근로인민에 대한 착취를 심화하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이 차관국의 화폐 유통 및 경제 구조 전반에 간섭 가능하도록 하는 기구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IMF와 IBRD에 미국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기구들의 총회가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학생운동이 불붙기 시작한 남한의 수도에서 개최된 것이죠.


  이때,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IMF·IBRD 총회가 진행되는 중대한 시기에 삼민투가 제국주의를 타격하는 투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됩니다. 이른바 반제그룹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제그룹의 삼민투 비판은 단순히 그들의 전술 입안 및 운용만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반제그룹은 삼민투의 이념인 삼민혁명론 자체가 결함이 있다며 그들의 핵심 노선을 정면으로 저격합니다. 반제그룹의 문제제기는 삼민혁명론에서 현실적 전선은 반파쇼 민주전선인 까닭에, 그 결과 반제투쟁이 투쟁의 다음 단계로 밀려나거나 혹은 아예 반제투쟁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 삼민혁명론을 비판한 반제그룹,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다


  86년 초, 반제그룹은 서울대를 시작으로 반제민중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고 민족해방의 기수로 부활하자라는 소책자를 배포합니다. 일명 해방서시로 더 유명한 이 소책자는 삼민혁명론을 공격하며 등장한 학생운동 내 신세력이 자신만의 노선을 내세우기 시작한 문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서시」는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반도 근대사 100년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요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역사라는 자못 도전적이고 명쾌한 역사 인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역사 인식이 도출해낸 것은 지금 여기, 86년 남한에서 혁명의 방법론은 삼민혁명론이 아니라 NLPDR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NL의 탄생입니다. 이어서 3월 18일, 서울대 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반전반핵투위결성식에서는 성조기로 감싼 허수아비의 화형식이 거행됩니다. 이 현장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구호 반전반핵 양키고홈이 등장했죠.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레이건.(1983. 04. 04)ⒸTime


  양키고홈은 그렇다 치고, 반전반핵 구호가 왜 나온 것인지 의아해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91년까지, 남한 주둔 미군에는 전술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86년 당시 미 레이건 정부는 군비 지출을 확대하고 레바논 파병, 리비아 폭격, 그레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 지원 등 공격적인 군사·외교 정책을 펼칩니다. 또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 우주에서 소련의 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이른바 ‘스타워즈’ 계획을 입안하려고 했죠. 이에 맞서 소련 측에서도 급격히 핵무장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냉전의 격화로 핵과학자협회는 지구 멸망을 가리키는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lock)’를 11시 57분에 맞춰두었습니다. 전세계는 핵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었고핵전쟁의 시작은 신냉전의 최전선이자 전술핵무기가 배치된 한반도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남한 NL계 학생운동권의 반전반핵 구호는 반제 평화 운동의 구호인 동시에 미국이 소련과의 대결 속에 한반도를 희생시킬지 모른다는, 실질적인 핵전쟁의 공포를 반영한 구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후 반제그룹으로부터 이어진 민족 운동은 반제 운동인 동시에 반미 운동, 반전 평화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러한 투쟁의 흐름을 집행하기 위해 꾸려진 기구가 위에서 언급한 반전반핵투위였습니다. 반전반핵투위는 반전반핵전방입소 거부 등의 슬로건을 걸고 운동에 돌입합니다. 당시 학생운동권이 전방입소를 거부했던 까닭은 그것이 곧 미제의 용병교육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신냉전이 ‘열전’으로 전화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팽배했던 시기, 전방에서 군복무를 한다는 것은 언제든 자신이 외세가 추동한 전쟁의 제일선에서 용병, 또는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재호 김세진 열사 추모비에 헌화하는 유가족들”(1987)Ⓒ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 16일,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 이재호는 서울대 반전반핵투위 투쟁위원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4월 26이재호는 자연대 학생회장이자 함께 반전반핵투위 활동을 해온 김세진과 함께 전방입소 전면 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 구호를 외치며 신림사거리에서 분신합니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분신은 NL계 반전반핵 운동의 상징적 사건이자 NL 성립 이후 최초의 ‘통일 열사’가 탄생한 사건입니다. 4월 29일, 2천500여명의 서울대생들은 살인마 미제와 괴뢰파쇼 처단을 요구했으며, 연후 NL 계열 학생운동권은 두 열사의 기일이면 추모 집회를 열게 됩니다.     


3. 학생운동, NL과 CA, 자민투와 민민투로 분화하다     


자민투 문건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 애국학우 투쟁선언-미제의 신식민지 파쇼통치 체제를 분쇄하자.”(1986)Ⓒ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반전반핵투위는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자민투입니다. 이후 반전반핵투위는 자민투의 산하 기관이 되지만, 성립은 반전반핵투위가 더 빨랐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당연한 말이지만자민투는 NL 세력이 건설한 투쟁 기구였습니다따라서 자민투는 삼민혁명론을 반대하며 한국사회의 혁명론은 NLPDR이라 주장합니다.

  NLPDR론은 먼저 남한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식민지 규정의 함의는 미제가 남한을 지배하고 있으며 전두환의 파쇼 체제는 미제의 대리통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민중은 반제자주화투쟁의 반미구국통일전선으로 나서야 하고, 이 운동이 바로 민족해방운동, NL입니다. 이때 당면 과제를 수행할 민중이란 노동자·농민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민족부르주아애국적 군인들까지 포함됩니다뿐만 아니라 NL은 신민당민주화추진협의회 등 보수파와도 제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NL이 내세웠던 또 하나의 현안은 조국통일촉진투쟁입니다. 분단은 미제 강점에 의해 한국 민중의 민족자립 요구가 짓밟힌 결과라는 인식에서 나온 전선의 설정이었습니다. 타 노선과 차별화되는 NL의 인식은 무엇보다 지금은 미제의 식민 지배 현실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할 때라는 것입니다.     

“신민당 지구당사를 점거하고 ‘헌특분쇄’를 요구하며 창가에서 구호를 외치는 민민투 소속 학생과 해고 근로자”(1986. 06. 2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NL 노선의 자민투가 삼민혁명론과 삼민투를 공격하며 탄생했다면, 삼민투를 이어받은 것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입니다. 물론 민민투라고 삼민투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기존 NDR 노선의 한계를 보완할 필요를 느끼며 등장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단, 삼민투의 한계를 지적하며 나타났다 하더라도 민민투는 자민투에 비해 계보이론실천 차원에서 삼민투와의 연계성이 더 두드러집니다. 이를 아래의 내용에서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민민투의 노선은 CA입니다. CA는 Constitutional Assembly, 제헌 의회의 약자입니다. CA의 남한 규정은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신군부를 미제의 대리인으로만 바라보는 NL과 달리, 그들은 파쇼 체제가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규정된 체제에 맞서 싸울 CA의 전술은 아예 새로 헌법을 제정할 의회를 소집하자는 것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매개로 민주적 권리들을 쟁취하자는 것입니다.

  제헌의회를 소집할 정세를 만들어낼 주체는 역시나 민중입니다. 단, CA가 상정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은 NL의 민중에 비해 협소합니다. CA의 민중이란 노동자·농민 등 근로인민대중에 가깝고, 특히 그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헤게모니를 쥐어야 함을 강조하며 NL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그리고 보수파와의 제휴는 불가하며 역으로 그들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것이 CA 계열의 입장입니다. 이에 대해서 NL은 CA의 노선은 대중성이 떨어진다며 재반박에 나섰죠. 이론 내에서 주체를 폭넓게 설정함으로써 가능한 최대의 대중적 저변을 확보할 여지를 마련한 NL에 비해 선명한 계급성을 강조하는 CA는, NL이 보기에 운동의 주체와 운신의 폭을 축소하고 있었으니까요.

  또 CA는 제국주의를 우선적으로 직접 타격해야 한다는 NL 노선의 이른바 반제직투론이 오히려 반파쇼민주화투쟁의 발목을 잡는다고 간주합니다. 민주적 권리는 새로운 헌법을 통해 쟁취될 수 있으므로, 다양하게 분산되어 있는 슬로건은 CA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제헌의회 소집으로 집중·통일되어야 합니다.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제헌의회라는 전술로써 집약되는 단일 전선으로의 집중·통일 등 우리는 NL에 비해 CA가 과거의 NDR론 및 삼민혁명론과 훨씬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첨언하자면, 식민지반봉건 사회라는 규정은 NLPDR 이론이 발전하며 정립된 것입니다. 「해방서시」를 비롯하여, NL도 그 내부에서의 세부 노선 차이, 그리고 시기 및 상황에 따라 남한 사회를 규정하기 위해 ‘식민지’ 아닌 “신식민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단, NL이 말하는 “신식민지”란 대체로 CA가 말하는 “신식민지”와 여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NL과 CA가 “신식민지”에서 각각 신식민지와 식민지에 방점을 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NL은 비록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에 나섰던 일제와는 형식상 차이가 있을지언정, 파쇼체제가 대리하는 식민지배라는 점에서 미제의 통치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반면 CA는 19세기말-20세기 초와 달리 제국주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고 파악하며, 비록 남한이 미국에 예속되었을지언정 어쨌든 현재 사회는 기존의 식민지배와 다르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4. NL, 캠퍼스를 장악하다


  자민투의 삼민혁명론 비판은 굉장히 유효하게 작용했습니다. 86년 상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대학가에서는 삼민투를 계승한 민민투가 우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대학에 있었던 삼민투 혹은 민민투의 상당수가 급격히 자민투로 전환했습니다. 심지어 몇 캠퍼스의 경우 이름만 민민투이고 실상은 자민투의 노선을 따르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NL은 삽시간에 삼민투계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학생운동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환의 『강철서신』,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유포되며 주체사상이 유입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서울대학교 5월제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들과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1986. 05. 22)Ⓒ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렇다면 NL의 세력 확장과 캠퍼스 장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서울대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초로 「해방서시」가 배부되고 반전반핵투위 및 자민투가 결성되는 등, NL계 이론 및 조직의 산실 노릇을 했던 곳이니 말이죠.

  서울대에서 NL은 서클주의를 청산하고 오직 운동의 헌신성만으로 무장한 단일한 학생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학생조직이란 RMO(Revolutonary Mass Organization), 즉 혁명적 대중조직인데, 이것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NL의 학생회론 및 조직론을 PD의 입장과 비교하며 상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혁명적 대중조직이라는 점에 주목을 부탁드립니다.

  70년대부터 이어진 학생운동은 주로 서클이라는 조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서클이란 기본적으로 이념 서클을 말하며, 함께 학습과 실천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생활까지 공유할 정도로 끈끈한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서클은 끈끈한 만큼 한편으로 폐쇄적인 조직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오버’서클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공안당국은 기본적으로 이들을 ‘지하’서클이라 불렀고, 정부가 조금이라도 반정권, 반체제적인 움직임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했던 엄혹한 정세에서 서클들이 주로 ‘지하’에서 암약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면 위로 부상하지 않고 물 밑에서 움직였던 소규모 공동체인 서클은, 어쨌든 대대적인 대규모 대중운동을 기획하고 실현하기에는 한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서울대의 서클 중 하나였던 고전연구회(고전 연구회는 지금까지도 서울대에 동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산하에서 단재사상연구회(단사)가 태동합니다. 단사는 NL 노선을 표방했고, 『강철서신』의 주요 필자 중 한 명인 김영환이 속해 있던 단체였습니다. NL 계열에서는 서클이 종파주의의 온상이라 간주단사를 필두로 대중적 운동을 위해 서울대에서 서클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서울대 법대 82학번 하영옥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레닌이 서클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을 건설한 걸 본”뜬 것이었습니다.

  대중운동을 위한 대중적 기구의 필요에 대한 공감대는 빠르게 확산되었고, 학생운동 내 구세력의 거점이었던 폐쇄적 언더서클들은 서울대에서 순식간에 사라져갔습니다. 그들이 사라진 공간에서 학생들을 포섭한 것은 이른바 오버서클 및 학회 등의 공개적, 대중적 단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조직들을 통해 구세력이 상실한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은 NL이었는데, NL이 서클 해소를 선두에서 외쳤음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겠죠.     

“‘민족 자주정권 수립하자’라는 깃발아래 모인 수많은 고려대생들”(1986. 08. 01)Ⓒ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대의 사례와 유사한 현상은 고려대를 비롯한 다른 캠퍼스들을 휩쓸었습니다. 비록 서클의 해소가 NL이 학생운동 내 패권을 획득한 유일하고 결정적인 계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NL의 세력은 기존의 기구들을 정리하고 접수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할 수는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신세력인 NL이 굉장히 신속하게 대학가를 장악했다는 것은삼민투 등의 기존 학생운동 세력이 보인 미진함에 대한 불만과 80년 광주 이후 불타오르기 시작한 반미 감정이 만연한 상황에서, NL이 주장한 현실 인식 및 운동 방법론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학생대중 속에서 폭발적인 화학 반응을 일으켰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NL은 탄생과 함께 주어진 조건을 온전히 활용하며 대중과 결합, 캠퍼스를 장악해갔습니다.    

  

4-a. 보론: NL의 서클 해소학생운동 몰락의 원흉인가?     

  여담입니다만,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저자 이진경을 비롯한 일부 논자들은 90년대 학생운동의 패퇴 원인을 서클의 해체에서 찾고 있습니다. 서클은 “다양한 운동을 위한 기본 자질을 기르는 곳”이었는데 서클의 해소는 운동가의 저수지를 말라붙게 한 일이었으며, 이후 등장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과 같은 NL계 조직은 서클에 비해 너무 경직됐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비판은 일정 부분 수용할 필요가 있겠지만, 저는 이러한 입장을 현실적으로는 썩 유의미하지 못한 평가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론적, 실천적 수준에서 볼 때 서클의 성원들은 대중에 비해 소수 정예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과연 이런 폐쇄적 조직의 내부 문화가 NL이 주도했던 대중조직들에 비해 실질적으로 더 유연한 운동의 실현을 보장할 수 있었는지그리고 대중조직보다도 더 많은 양질의 활동가들을 양성할 수 있는 저변을 제공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비판적인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또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서클의 해소를 주로 서클 내 선배 그룹이 아닌 후배 그룹이 주도했다는 것입니다. 서클 해소기는 타 조직보다도 더 일사불란한 중앙 NL 조직이 건설되었거나 그 성원의 조직이 온전하게 완료된 것도 아닌, NL이 구세력의 기반을 흡수하며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과정 중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존재조차 불분명한 NL 상부(?)가 지시를 내렸다고 단번에 언더서클들이 무너져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달리 말해, NL의 서클해소론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기에 다수의 학생들이특히 후배 그룹이 이를 받아들이고 또 NL로 넘어간 것이라고 보는 편이 온당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이러한 가설을 세우는 편이 더 큰 타당성을 보장할 것입니다. 언더서클에 속한 후배 그룹이 서클주의에 대한 NL의 문제 제기를 대체로 수용했던 것은이미 예전부터 서클 체제가 그 지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부적 불만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의미라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언급할 논점은, 그렇다면 서클 해소 이외에 어떤 대안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아직 조직노동자 대오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이전, 80년대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 최대의 대중 동원력을 가졌던 세력은 학생운동권이었습니다. 물론 서클의 해소와 대중기구로의 전환이 일장일단을 가졌음은 명약관화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이 소수 정예 조직들이 물밑에서 암약하는 서클 체제에 머물러 있었다면 정치의 장에서 대규모 학생 대오가 움직이는 일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만약 최대 규모의 동원력을 지닌 운동 진영이 음모가적 지하 조직 체제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87년 6월 항쟁과 같은 국면이 과연 가능했을까, 라는 질문을 저는 던져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덧붙이자면, 서클해소론의 제기와 분리불가능한 NL의 성장그 첫 번째 동인은 다름아닌 NL 노선 및 조직론의 대중지향성이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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