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하나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
"고추 하나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
친할머니는 딸 둘을 데리고 온 엄마를 보며 한마디 하셨다.
"둘 중에 하나는 달고 나왔어야 하는데"
그래서 나 어릴 적 엄마는 친할머니 댁에만 다녀오면 무척 속상해하셨다. 엄마 자신보다도 그 말을 듣는 딸들(나와 동생)을 생각했으리라.
친할머니한테는 '중요한 거' 하나 빠진 여자아이들일 뿐이었지만, 외가에서 나와 내 동생은 최고로 대접받는 공주였다. 우리 둘을 제외한 이종사촌 5명 모두 남자아이(손자)였기 때문에 나랑 여동생은 외가댁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1980년대. 그 시절까지도 아들 선호 사상이 팽배했다.
고모 1명을 빼고는 아들만 6명인 친할머니한테 아들 낳는 건 누워서 떡먹기였을 거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아빠한테 말씀하셨다.
"어디서 아들 하나 낳아오는 건 어떠냐?"
농담 인지 진담 인지 모르겠지만 친할머니께서 쏟아내신 이 말이 며느리 가슴을 얼마나 후벼 팠는지 모르실 거다.
나와 내 동생이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잘하면서 자랑이 되자, 친할머니의 아들 타령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할머니 입을 닫게 한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엄마가 용기 내어 아들 타령에 대한 엄마 마음을 친할머니께 솔직히 전하셨다.
그 후 친할머니는 엄마 앞에서 더 이상 "아들" 이야기를 안 꺼내셨다.
"제발 손녀 1명 낳아다오"
나는 아들만 셋인 집의 막내며느리다.
큰 며느리가 아들을 낳자, 막내며느리인 내가 임신했을 때 우리 시부모님은 두 손 모아 손녀를 원하셨다. 병원 초음파 검사 결과 '고추'가 보인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어머니 반응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님, 아들이에요"
".... 사진이 잘못 나올 수도 있지 않냐..."
요새 초음파가 얼마나 선명한데... 하지만 시어머니는 내가 출산하는 날까지 손녀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어릴 적 귀가 따갑게 "고추" 타령을 들어왔던 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손녀" 타령을 듣다니... 시댁 식구 모두 내 뱃속의 아이가 손녀 이길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도 시부모님은 손녀를 바라셨다. 하지만 둘째도 아들이었다. 형님도 아들만 둘.
명절 때 시댁은 시어머니, 며느리 2명까지 3명을 제외하고 7명의 남자가 넓은 거실을 그득 채운다.
장난꾸러기 아들만 둘...아니 크림이(강아지)까지 아들만 셋 ^^
" 역시 딸이 있어야 해"
어제는 아빠 친구분께 전화가 왔다.
홀로 떨어져 사는 아빠 친구 근황을 들으시더니 엄마가 한마디 하신다.
"아빠 친구 OOO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 혼자 사는데 챙기는 건 딸뿐이더라. 역시, 딸이 있어야 해"
'엄마는 딸이 둘이나 있어 좋으시겠어요. 나는 딸이 없는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