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준한 시간부자 May 21. 2022

시간부자70-②아버지의 이름으로(필사)

1일 1독 같이 하실래요?

<1일 1독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매일 1권을 읽었을 때 나의 변화를 알고 싶어 시작한 프로젝트!

2022.2.9부터 시작!!


아버지의 이름으로

-학교폭력과 20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1. 읽은 날짜 : 2022.5.17(화)    *70권

2. 작가/출판사/분야 : 김종기/은행나무/사회과학

3. 내가 뽑은 키워드(3가지) : 자살, 참척(자손이 부모나 먼저 죽는 일), 단장

4. 내가 뽑은 문장 : 나는 과연 너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이해했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믿고 사랑했었던가?

5. 나의 감상평 : 청소년 폭력 예방을 위해 애써주신 김종기님께 감사의 마음이 든다.



<필사>

< 이지메(석기영) >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제 한 몸마저 땅으로

떨어뜨렸을까.


슬픔이 얼마나 컸으면

그 꿈 많은 청춘을 바위에 으깼을까.


얼마나 괴로움에 지쳤으면

모든 꿈 접고 저 홀로

눈부신 태양 아래 피로 잠들었느냐

(14페이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대현이는 동부이촌동의 K고등학교에 갔다... 대현이는 반포에서 산 기간이 짧았기에 홀로 강북 쪽 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반면 친하게 어울리던 친구들은 거의 강남에 위치해 있는 세화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대현이의 고난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던 같았다. 가장 중요한 친구들, 자기를 지지해 주고 함께 대화할 친구들이 곁에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잘 몰랐다. 몰랐다기보다는 믿었다는 게 정확하다. 홍콩으로 파견 나갈 때 가장 걱정했던 건 아이들의 적응 문제였는데, 우리 부부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은 잘 적응을 했었다. 그리고 귀국 후 초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잘 이겨냈기 때문에 이번에도 결코 큰 탈 없이 잘 적응할 것이라고 은연중에 믿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학교에 그렇게 괴롭힘이나 폭력이 만연한 줄 몰랐다(20페이지)


아비의 회한.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진학 후 대현이의 얼굴은 늘 우수에 젖어 있었다.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어떨 땐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오기도 했고 어떨 땐 몸에 자잘한 상처들이 보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도대체 왜 이리됐느냐?"라고 따져 묻기도 했지만, 대현이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불량배들을 만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후회스러운 것은 대현이에게 나는 너무 엄격한 아비였다는 점이다. 나는 아이들을 사치스럽게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이 뚜렷했고, 강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경비만 주었다. 당시 반포에서 동부이촌동까지 가려면 교통이 무척이나 복잡해서 버스를 타고 다리 건너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 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내 차로 대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지 않았다(21페이지)


내가 대현이를 사랑한다는 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 나는 신원그룹의 기획조정실장 전무(이하 기조실장로 할 일이 많았고 사실 바빴다... 집안일이나 아이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도저히 없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모두가 헛되고 헛되다. 아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고 보니 출세고 명예고 그 무엇이고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한 것이고,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왜 그때 아이들에게 좀 더 다정다감하게 대하지 못했던가 하는 뼈저린 후회만이 가슴을 친다(22페이지)


내가 베이징으로 출장을 떠나던 날 아침,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는 대한이를 마지막으로 본 그때, 대현이의 표정은 너무 어두웠다. 1995년 6월 6일, 현충일 오전 9시경이었다. 그날도 공휴일이었지만 북한과의 사업을 추진하던 때라, 평양 측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 출장길에 올라야만 했다. 아파트 1층 현관을 다 내려와서야 뭔가를 놓고 나온 것이 생각나 대현이를 불렀다. 5층짜리 아파트이고 인터폰도 없어서 현관에서 큰 소리로 5층에 있는 대현이를 불렀다. 부탁한 물건을 들고 내려온 대현이의 얼굴에 짙은 그리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미 죽음을 결심한 상태였을 것이다. 녀석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길 바라며, 간단히 "고마워~! 힘내!" 한마디를 남긴 채 나는 차에 올라타고 서둘러 출장을 떠났다.

나는 6월 8일 출장을 마치고 돌아올 계획이었고, 대현이는 그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다. 왜 하필 내가 돌아오는 날 새벽이었을까? 왜 내가 없는 때를 골랐을까? 그 엄청난 결심을 하고 자기 방문을 열고 창문에 섰을 때, 대현이는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무엇이 그토록 힘든 결정을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 무서운 1차 실행에 실패했다면, 죽기를 포기해야지, 왜 재차 몸을 던진단 말인가. 대현이가 피를 흘리면서 애써 다시 아파트를 올라 5층 난간에 서는 동안 그 쓰라리고 처절했을 마음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다시 난간에 서서 밑을 바라보던 열여섯 살 소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내 가슴은 쓰리다 못해, 차라리 찢어진다는 표현이 맞다.

그토록 처절한 아들을 지켜 주지 못한 이 못난 아비가 어찌 이 세상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성공이니 부니 하는 것도 다 부질없다. 난 이 세상 어떠한 벌이나 고통이라도 마땅히 감수하고 살아야 할 죄인인 것을(23페이지)


만약에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생을 걸고 20년 전으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아니 만약에 아들과 나의 생명을 맞바꿀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바꿔도 좋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24페이지)


1995년 6월 8일
 사람은 누구나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이날, 내 아들 대현이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26페이지)


대현이는 그날 새벽 3시쯤 아파트 5층 자기 방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열여섯 살 대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 남짓 지나 자살을 선택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대현이는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 위로 떨어졌고 상처만 입었다. 몇 군데 찰과상을 입어 피가 났고 대현이는 피를 흘리며 그대로 아파트를 돌아 현관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다시 5층. 하지만 대현이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복도 창문을 넘었다. 그 창틀 아내 남아 있던 핏자국이 정말 마음 아팠다. 이번에는 아래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던졌고, 아파트 입구 현관의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졌다(28페이지)


참척(慘慽: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의 고통은 믿기지 않을 땐 실감이 나지 않다가,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 뼛속 깊숙한 곳까지 통렬하게 와닿았다(32페이지)


자식 묻은 부모 가슴은 위로나 치유라면 모를까. 회복될 수도, 치료될 수도 없다. 그저 평생 안고 가면서 다독거릴 뿐(39페이지)


대현이가 자살을 택한 이유를 찾아가다가 학교폭력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크기와 깊이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고, 학교폭력에 대한 인식조차 우리 사회에 없던 때였다. 대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폭력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상황과 정도를 정확하게 알진 못했다. 그저 운이 나빠서 학교 주변 불량배들에게 피해를 입은 정도라고 알고 있었다. 우선은 대현이가 집에 오는 길에 깡패들을 만났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경찰서에 들어가 대뜸 소리를 버럭 질렀다...

또 하나의 이유, 나와 아내는 대현이가 괴로운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것으로 믿었다. 우리는 그동안 대현이가 어떤 상황 앞에서 실패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밝고 현명한 아이였고, 과거 홍콩 학교에서의 적응도, 귀국 후 친구들 간의 갈등도 잘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학교폭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대현이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방모 양이었다. 그 여학생은 박모 군과 사귀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의 마음이 대현이에게 쏠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박 군이 대현이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 학생은 대현이보다 나이가 한 두 살 많았고 소위 말하는 '불량학생'이었다. 또한 박 군의 친구들 중에는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 학생들이 함께 대현이를 수시로 불러내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전혀 짐작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52페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다시 돌아간다면,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51페이지)


용서라는 말.

용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겉으로 보기에 나는 가해 학생들을 용서했다. 요즘 정서로 보자면 고소해서 처벌을 받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와 만난 가해 학생들은 그리 반듯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불쌍한 표정이었다. 그들에게도 어떤 미래가 있을 것이다(52페이지)


오히려 내가 그 아이들을 처벌하지 않은 건 대현이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내가 했던 용서는 사실상 포기에 가까운 용서였다. 그 학생들이 또다시 나쁜 짓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반성문과 다짐을 받았던 것이고, 그건 숨진 대현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 그 학생들에게 원하는 것은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학생들의 표정에서 나는 반성의 기미를 분명히 보았다. 가해자로서 피해자의 아버지를 만난 자리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겁이 나기도 했겠지만, 그 기죽고 암담한 학생들의 표정을 나는 적어도 반성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을 지키지 못한 아비가 가장 큰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아비라는 게 뭔가, 자식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버티목 아닌가. 자식을 잃은 주제에 '남' 탓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53페이지)


가해 학생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도대체 왜 그랬느냐' 묻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받았다. 그게 다였다. 이제는 그 아이들의 삶이 어떤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잘 살고 있기를 바랄 뿐. 아마 2003년으로 기억하는데, 대현이의 가장 친한 친구인 재용이에게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옷이라도 몇 벌 사주고 싶어 가산동 쇼핑몰에 들렀다가 저녁을 함께 한 적이 있다. 한 식당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몇 잔 나누더 중 재용이가 "아버지, 이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지만.."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대현이를 가장 괴롭혔던 '짱' 장경환이 1년 전쯤 자살을 했다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혹시 대현이 일이 늘 마음에 걸려서 괴롭게 지내다 죄책감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 아버지는 또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순간 온갖 생각으로 착잡했다(54페이지)


학교폭력의 냉혹한 현실.

"대현이를 때렸던 그 아이들이 이 땅에 없었으면 좋겠어요"

대현이가 떠난 그해 8월, 우리 가족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이야기냐, 나는 물었고, 딸은 대현이를 괴롭혔던 학생들이 다시 대현이의 친구 두 명을 불러 폭력을 휘둘렀다고 했다. 심하게 맞아 한 명은 기절했고 다른 한 명은 팔이 부러졌단다.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검찰에서 피해 학생 부모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두 어머니는 진술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학 진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보복도 무섭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시 발생한 폭력사건으로도 가해 학생들을 처벌하는 데 실패했다. 다섯 학생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학교폭력은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폭력은 학교와 가정, 학생이 모두 얽힌 지극기 구조적인 병폐였던 것이다(59페이지)


경향신문의 별지인 <매거진 X>에 '어느 날, 한 소년이 몸을 던졌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학교폭력에 앗긴 푸른 삶, 누가 그를 자살로 이끌었나'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61페이지)


일이 전부였던 아비.

1995년 6월 8일 새벽에 아이와 함께 있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죽을 결심을 하는 외로운 시간 동안 어떤 힘도 아이에게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사회에서 나의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고 나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나의 가족과 아이를 돌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 모든 생각과 에너지를 나의 일과 회사에 쏟았다(65페이지)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

대현아! 내 사랑하는 아들 대현아!

한창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꽃잎처럼 네 몸을 던져

이 모진 세상을 떠나 버린 지 어언 3년.

...

무엇이 그토록 너를 방황하게 했던가?

무엇이 너를 죽음까지 몰로 가게 했던가?

나는 과연 너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이해했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믿고 사랑했었던가?

(114페이지)


학교폭력의 실체. 청예단이 학교폭력을 막기 위해 설립된 단체라는 건 이제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다(122페이지)


교육부의 냉대.

20년 전 청예단 설립은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우선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전화 상담 도움이라도 해 주기 위함이 출발의 전부였다.... 처음 단체 설립 허가마저 안 내줘서 '학교폭력'을 지우고 '청소년 폭력'이라고 수정한 후에야 허가를 받았던 아픔은 앞서 말했다... 1996년 초 교육부로 회의 차 간 내게, 학교폭력이 어디 있느냐면서 "부모가 잘 못하니 아이가 자살하지!"하고 내 면전에 내뱉듯이 모독적인 말을 하면서 의자를 뒤로 돌린 그 공무원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학교폭력 설문조사 하나 하려고 해도, 모든 학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대문을 닫아걸고 "우리 학교는 폭력이 없다"라고 조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예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청단은 그렇게 거대한 구조적 철옹성에 대항하며 싸워 왔다. 학교에 학교 폭력은 절대로 없었다(142페이지)


2001년 여름 마침 성동구 모 여자중학교에서의 학교폭력이 MBC뉴스에 나오며 '학교 가기 싫어'라는 청소년카페가 등장했다... 2004년 학폭법(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이 의원입법 형태로 국회를 통과했다... 참고로 교육부에 정식으로 '학교폭력 근절과'가 신설된 것이 2012년 8월이니, 경향신문 <매거진 X> 특집 보도 이후 무려 17년이 지난 후이다(144페이지)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잊을 수 없는 아픈 경험들을 하나둘 쌓아 가는 일일지 모른다(161페이지)


 옛 중국 명사들의 일화를 다룬 <세설신어> 출면 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진나라의 장군 환온이 배를 타고 험하기로 유명한 산협을 건널 때 그의 하인이 원숭이 새끼를 잡아 배에 태웠다. 그러자 그 원숭이의 어미가 슬프게 울면서 기슭을 따라 1백 리나 내려왔다. 배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그 어미 원숭이는 제 새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배로 뛰어내리다 죽고 말았다. 병사들이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다. 환온은 새끼 원숭이를 풀어 주고, 원숭이를 잡아 온 하인을 크게 혼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과 고통'을 뜻하는 단장(斷腸)은 여기서 비롯되었다(259페이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당시 출연금은 1억 원이 최소의 요건이었다. 그것을 마련해 내고 재단법인을 출범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나 딸이나 어떤 가족 단 한 사람도 재단 이사로 앉히지 않았다.... 청예단을 대현이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을 주기 위한 것, 대현이에게 바친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 정리가 비교적 쉬웠다. 학교폭력으로 힘든 청소년에게 그 꿈과 사랑을 찾아주기 위한 법인이고, 또 지금까지 지인들, 시민들의 후원으로 일해 온 것이니, 그 주인도 어차피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내가 죽은 뒤 남은 전 재산을 청예단에 기부할 것이라고 이미 2012년 10월 11일 이사장으로 재취임하면서 선언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가벼워졌다. 그것 참 이상하다. 모든 복잡함과 욕심을 버리고 나니 아주 편하다(265페이지)


취임식 전날, 그러니까 재산을 환원하겠다는 발표를 하기 하루 전날, 딸에게 전화했다. 아빠가 이리저리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딸은 별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너무 의외여서 말귀를 잘 앋아듣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전화를 끝내고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내는 쉽고, 친절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네게 돌아갈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야..."

이튿날, 취임식장에 단아한 모습으로 참석해 아비의 일을 축하해 주었다. 내 딸이지만, 그 의연한 마음과 모습이 참으로 멋있고 대견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 내게 별다른 사심은 없다. 가족도 청예단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 떠난 뒤 남을 유산 역시 청예단에 남겼다... 지금부터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은 명확하다. 청년이 된 청예단의 뜻을 잘 세우고 이뤄 가는 것, 초심과 근본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바꿔 말하면, 내가 후임 이사장과 임직원들에게 바라는 바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268페이지)




2019년, 기관 명칭 변경 : 푸른나무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 '푸른나무 재단

*이유 : 청소년 폭력을 넘어 시민과 국제사회 등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함



김종기 님, 유퀴즈 온더블럭에 출연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부자70-①아버지의 이름으로(목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