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경성, 1938
남산은 밤마다 숨을 고르듯 어둠을 삼켰고, 경성의 그림자는 그때마다 제 몸집을 바꿨다.
나의 이름은 김경산, 경성 남산 라디오국 외부 매표창구의 잡부이자 견습 사환이었다. 라디오국이라는 공식적인 이름 대신 사람들은 그것을 전파국, 방송소, 혹은 남산의 불빛이라고 불렀다. 나는 매일 아침 남산골 하숙방에서 방송소로 통하는 가파른 길을 걸어 출근했다. 사환이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온종일 방송실을 청소하고, 퇴근 전에는 그날 쓰고 난 대본을 모아 버렸다. 유리로 둘러싸인 로비는 낮과 밤을 고르게 반사했고, 입구에 난 자갈길을 쓸어낼 때, 빗자루 끝에서 가루처럼 부서지는 시간을 쓸어냈다. 밤이 오면, 라디오국은 다른 생명을 얻었다. 방송실 안에서는 아나운서들이 달빛을 읽는 속도로 문장을 말했다. 기술실의 진공관은 작은 등불처럼 달아올랐다.
아직 여름이 식지 않은 밤이었다. 방송소 복도는 방송을 마친 기계들의 열기로 아직 뜨거웠다. 나는 퇴근 도장을 찍으려다 말고, 복도 끝에서 누군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가죽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 그리고 강찬규 기자가 나타났다. 그는 연희전문 학생이었다. 서늘한 눈매, 말수가 적고 늘 책을 들여다 보는, 그러나 비밀을 한 줌쯤 쥐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던 그가 숨을 고르지도 않고 내 손에 묵직한 가죽 가방을 들이밀었다.
“명동 성당… 매향에게. 꼭 좀… 부탁하네.”
“아니, 갑자기 왜…”
나는 제대로 묻지도 못한 채 얼결에 가방을 받아 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무게가 이상하게 불안했다.
찬규는 대답할 틈도 없이 건물 밖으로 향하더니 산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하얀 숨결이 밤공기 사이에 흔적처럼 남고, 그의 그림자는 비탈길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순사 둘이 골목 모퉁이를 틀며 튀어나왔다.
“거기 서라! 강찬규!”
그들의 목소리는 야수의 울음처럼 골목을 찢었다.
찬규는 도망쳤다. 신발이 구두 대신 나막신처럼 끌리는 소리. 하지만 비탈은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덫처럼 달려든 순사들은 그를 곧바로 땅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몽둥이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툭, 퍽, 또 퍽.
찬규의 몸이 매번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 소리가, 그 떨림이, 비탈을 타고 내 발끝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 가죽 가방의 손잡이가 내 손에서 땀에 젖어 미끄러졌다. 그 무게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뭔가가 이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
나는 아무 일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비탈길 아래서는 여전히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고, 순사들의 욕설과 찬규의 흐린 신음이 뒤엉켜 공기 속에서 흔들렸다. 밤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죽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명동 성당까지의 길을 생각했다. 한 번도 가볍지 않았던 경성의 밤이, 그날따라 유난히, 숨이 막힐 만큼 무거웠다.
명동성당 앞은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가죽 가방의 손잡이를 꼭 쥔 채, 발끝으로만 그 자리를 디디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면 가방 속 무언가가 살짝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작은 소리만으로도 심장이 한 뼘씩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각각의 목적을 안고 성당으로, 혹은 명동 거리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얼굴들이 하나같이 낯설고, 또 위험해 보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었다가 금세 숙였다. 누가 신자고 누가 순사와 연결된 밀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중년 남자가 나를 힐끗 보고 지나쳤고, 검은 코트를 입은 여인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향냄새를 풍겼다.
‘저 사람이… 매향일까? 아니면 그 옆에 앉아 있는 저 노파일까? 혹은—저 멀리서 담배 피우는 남자?’
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말 한마디 잘못 꺼냈다가, 가방을 맡긴 강찬규처럼 어디론가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입술이 바짝 말라서 떼어낼 때마다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감촉이 났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듯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 내 시선을 맞잡는 순간마다 소스라치듯 피했고,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며 “무슨 일로 왔나?” 하고 물을 것만 같았다. 나는 성당 앞 군중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떨며,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을 품은 채 작은 새처럼 눈동자를 흔들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그림자가 스르르 다가오듯— 어떤 여인이, 얌전한 걸음으로 내 앞에 멈춰 섰다. 마치 내가 그녀를 찾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는 나보다 한 뼘쯤 작은, 눈매가 부드러운 여인이었다.
“제가 매향입니다.”
그녀의 말은 종소리처럼 잔잔했지만, 그 아래엔 설명할 수 없는 단단함이 깔려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가방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강찬규 씨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매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잠금을 열었다. 그리고 가방 안쪽, 숨겨 둔 얇은 종잇장을 꺼냈다. 그 종이를 펼쳐보는 그녀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죄책감인지, 안도인지, 혹은 작별의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곧이어 그녀는 종이를 손바닥에 꼭 접어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방을 내게 다시 건넸다.
“안에 든 건… 가지세요.”
“저한테요?” 나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분이 저에게 주려던 것은 받았습니다. 다른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당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성문을 닫은 듯한 기척이 스쳤다. 매향은 그 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신 일… 아무에게도 말씀하지 마세요.”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남은 건 가방 하나와 설명되지 않는 그것의 무게였다.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가죽 가방을 품에 안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동 성당에서 매향이 마지막으로 지었던 그 슬픈 미소가, 가죽 가방의 무게보다 더 깊게 마음을 눌렀다. 다락방 문을 닫자, 좁은 방 안이 갑자기 숨막힐 만큼 조용해졌다. 등잔불을 하나 켜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금쇠를 당기는 순간, 금속이 닿는 소리가 짧게 울려 밤의 적막을 깨뜨렸다. 나도 모르게 숨이 떨렸다.
나무 결이 고요히 번지는 금빛 격자무늬 라디오였다. 진공관 속 불빛이 숨 쉬듯 흔들리고, 다이얼엔 숫자 대신 작은 별표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월급 석 달이 통째로 들어가는 값비싼 물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채 나는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다이얼을 스치는 순간, 마치 어둠 속에서 별자리를 만지는 듯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