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 하숙

by 영인

프롤로그



종로 골목은 밤이 깊을수록 길쭉하게 늘어졌다. 비가 머물다 간 뒤의 돌바닥에는 희미한 물결무늬가 남아 있었고, 지붕 아래 고인 물방울들이 간헐적으로 떨어져 어둠 속에 일정한 간격으로 미세한 음을 만들었다. 강찬규가 달맞이 하숙에 도착했을 때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순사들을 따돌리느라 빙빙 돌다 결국 도착한 곳. 찬규는 하숙집 대문 앞에서 무심코 고개를 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2층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다락 창문이 아주 약간 열려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창에 잠깐이지만 그림자가 비쳤다.

여인의 형태였다.

어깨의 폭, 목의 기울기, 천 조각처럼 얇은 소매 끝, 형태는 뚜렷하지 않았으나 빛과 어둠의 경계로 인해 그 윤곽만은 정확히 구분되었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빗어 내리는 실루엣. 달빛은 여인의 머리 위에 얇게 쌓였고, 빛이 닿은 지점은 반사되지 않고 흡수된 듯 어둡게 내려앉았다. 마치 빛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빛을 머금는 것처럼 보였다.

여인의 얼굴이 있을 자리에는 어둠이 일정하게 모여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달빛이 닿아야 보일 법한 부분들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공간은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를 정확히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그 머리칼이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달빛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 뒤에야 세상이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찰나였지만,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 까만 눈동자가, 밤을 뚫고 그의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아—’

비명도, 감탄도 아닌 소리가 그의 내면에서 터졌다. 말로는 다 닿지 않는, 첫 번째 충격. 달이 그의 가슴 안쪽에서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고요했다. 찬규는 숨을 잊었다.

‘삑—’

순사들의 호각소리가 달빛을 부서뜨렸다. 구둣발이 돌바닥을 내리찍으며 몰려오는 소리.

그 소리에 찬규의 심장은 한순간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듯 하숙집 대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달빛이 남아 있었다.



(1)


나는 원래부터 낭만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내 이름, 운도(雲道)부터가 평범하고 밋밋하다. 연희전문 공과에서 숫자와 도면을 들여다보며 지내다 보면,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일보다 저항값이나 강도를 계산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하숙집에 들어온 이후로도 나는 방 구조나 계단 각도, 보일러 배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파악했다. 사람들에 대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달맞이 하숙은 남산 중턱 비스듬한 경사 위에 붙어 있다. 대문에서 마당까지 이어지는 계단은 여섯 칸, 그중 네 번째 칸이 약간 내려앉아 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그곳부터 물이 스며든다.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과 안채, 그리고 2층 위로 다락방이 있다. 다락방 창은 서쪽을 향해 있고, 손바닥 두 개를 겨우 펼 수 있을 만큼만 열리는 구조다. 원래는 짐을 올려두던 곳인데 난리 통에, 혹은 그 전의 어느 시절에, 누군가 사람 사는 방으로 바꾸어 버린 모양이다.

나는 그 다락방 아래, 복도 끝의 작은 방을 쓰고 있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도 근처 학교 학생들이 묵던 방이라고 주인 노인은 말했다. 벽을 손으로 두드려보면 같은 집인데도 소리가 다르다. 내 방 벽은 속이 꽉 찬 소리가 나고, 다락방 바닥은 텅 빈 소리를 낸다. 그 텅 빈 울림이 때때로 사람 목소리와 섞여 올라온다. 밤 깊을수록, 마치 위층에서만 시간이 따로 흘러가는 것처럼.

그해 어느 저녁, 나는 하숙집 방 안에서 공부 중이었다. 방 안에는 얇은 책상, 반쯤 눌린 베개, 그리고 오래전 주인이 두고 간 작은 등잔 하나가 있었다. 창문틀의 나무는 마모돼 결이 드러났고, 그 사이로 바람 한 줄기 없이 달빛만 끼어 있었다. 복도 끝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낮게 울렸고, 나는 책을 읽던 눈을 들어 문밖을 응시했다. 문고리 바깥쪽이 빠르게 두 번 흔들렸다. 내가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강찬규가 서 있었다. 그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한 손으로 문틀을 짚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찬규의 바짓단에는 남산 아래 골목에서 묻어온 붉은 흙이 잔뜩 들러붙어 있었고, 입술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찬규는 나와 같은 학부 학생이었으나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그의 입에서 말이 새어 나오기 전에 창문 아래에서 우르르 달려오는 군화 소리가 파도처럼 밀고 들어왔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어 방안으로 맞아들였다. 문을 닫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낡은 코트 아래 숨겼던 종이 뭉치가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월등회(月燈會)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밖은 이미 난리였다. 누군가 “이 근처다!” 하고 고함을 질렀고 다른 이는 뭔가를 걷어차는 소리를 냈다. 수색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그때 문득 떠올렸다. 내 방 바로 위, 늘 비어 있던 다락방. 그리고 그곳으로 통하는 누구도 모르는 작은 문; 책장 뒤에 숨어 있는 비밀 통로.

심장이 귓전을 울렸다.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책장을 힘껏 밀었다. 나무 바닥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책장 뒤에 숨겨져 있던 작고 어두운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른 올라가시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창규가 문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그의 닳고 구멍난 양말뒤꿈치가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는 순간, 나는 문을 닫았다. 책장을 되밀었다. 등잔불의 그림자가 요동쳤다.

내가 책상 앞 제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순사 둘이 들이닥쳤다. 하나는 책상을 뒤엎으며 살폈고, 다른 하나는 벽을 두드리고 이불 속을 걷어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 학생, 누구 못 봤나?”

순사 하나가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마침내 방을 나갔다. 군화 소리가 멀어지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조용히, 아주 조용히 숨을 토해냈다. 방 안에는 여전히 폐 속에 갇혀 있던 공포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2)

찬규는 순식간에 다락방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아래에서는 순사들의 발소리가 뒤엉켜 들렸고, 누군가 욕을 내뱉는 거친 기척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락방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소리를 죽여가며 문 곁으로 몸을 숨겼다.

찬규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흰빛이 배어 있는 치맛자락, 달빛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만들어낸 얇은 윤곽, 그리고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을 가진 여인. 아까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이구나 싶었다.

찬규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만, 정말 잠시만 숨을 곳이 필요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갈라지고 떨렸다. 그녀가 순사들에게 소리라도 지르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미안함보다 두려움이 먼저 그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 두려움 사이로 자꾸만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본 그녀는 한순간을 멈추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달빛이 닿지 않아도 윤곽이 빛을 품은 듯했고, 눈동자는 그림자 속에서 가만히 흔들렸다.

그녀는 찬규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화낼 것 같지도, 도망치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리어 오래전부터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했고, 그 침착함이 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운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놈들은 갔소. 괜찮으시오?”

그때, 그녀가 손을 들었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이 붉게 도톰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쉿.

말하지 마.

숨조차 세게 쉬지 마.

그간의 두려움이 그 몸짓 하나에 묘하게 가라앉으며, 찬규는 무릎이 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두 시선이 마주친 곳에서, 그녀는 찬규를 향해 아주 작은,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은 흔들리는 등불이 켜지는 순간처럼 순식간에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처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달빛 아래에서 느꼈던 전율이 되살아났다. 찬규는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있었다.

다락방은 고요했다.

아래에서 순사들이 고함을 치며 쿵쿵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찬규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그녀의 숨이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아직 밖은 위험하니, 안전해질 때 까지는 거기 있는 게 낫겠소.”

운도의 목소리에 찬규는 고개만 끄덕였다.


(3)

밖에는 밤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종로 골목의 전신주와 담벼락, 간판과 처마 끝이 모두 연한 막처럼 덮여 있어, 골목 전체가 숨을 억누른 채 담요 아래 묻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개가 발목에 부딪혀 흩어졌고, 그때마다 축축한 냄새가 허파 깊이 스며들었다. 달맞이 하숙의 지붕은 안개를 먹은 듯 흐릿한 윤곽만 남아 있었고,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 한 장면처럼 먼빛에 잠겨 있었다. 그 지붕을 바라보니 묘하게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이 집만큼은 내게 익숙한 공간이었으니까.

골목 어귀에서는 아직도 순사들의 발소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철심 박힌 군화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는 밤공기를 여러 겹 찢어놓았다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벽에는 강찬규의 얼굴이 그려진 전단이 너저분히 바람에 펄럭였다.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고, 그 위에 덧그은 글씨들이 마치 누군가의 분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찬규의 전단을 힐끗 보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숙집 문을 열자 주인 노인이 등잔불 아래에서 담뱃대를 비우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주 보던 그 특유의 인상이 있었다. 늘 조용하지만, 묘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요즘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런가, 자네 얼굴이 좀 상했어. 괜찮은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어르신. 안개가 좀 짙어서 그렇지 별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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