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눈

by 영인


눈이 내리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 이런 결일 것이다.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문턱까지 스며드는 살얼음 같은 기척. 나는 그 소리 속에서 일주일을 살기로 했다. 명동각 부엌 일은 대수롭지 않았다. 씻고, 썰고, 불을 지피고, 젖은 앞치마를 털어 말리는 일. 일주일 동안 시골에 내려간 시종 대신 잠시 일하러 온 조선인 여자. 사람들은 나를 잠시 채워 넣은 빈자리쯤으로 알았다. 비루한 풀잎이나 버려도 좋은 볏짚 한 무더기처럼 대했다. 아무도 나를 몰랐다.

나는 독립군이었다. 의열단이었다. 그중에서도, 총을 겨눌 때 손이 떨리지 않는 사람, 젓가락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어떤 임무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이십여 년 동안 내 목에 걸린 현상금이 경성 중심가 집 한 채 값이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여기까지 온 건 단 하나의 이유, 목요일 저녁, 명동각 연회에 참석할 젊은 장교, 수많은 동지를 죽였고 앞으로 더 죽일 놈. 그를 내 손으로 끝내라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수요일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져 저녁부터는 눈발이 날렸다. 내 시선은 자꾸만 건너편 연회장 쪽을 향했다. 연회장에 앉아 있을 표적의 얼굴을 상상했다. 표적이 헤벌쭉 웃고 있으면 더 좋은 일이다. 가장 안심하고 있을 때, 느슨한 그의 얼굴을 놀라게 해줄 테니. 그가 죽인 사람들처럼 그도 저승에 보내 버릴 테니.

계획은 간단했다. 연회장 밖에서 의열단 저격수가 표적을 노릴 것이다. 저격수의 총은 표적을 놓친 적이 없었지만, 만에 하나, 표적이 죽지 않을 때 내가 움직일 것이다. 나이 먹은 조선인 여자가 표적의 목에 비녀를 꽂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내 나라를 위해, 가난하고 애처로운 민족을 위해, 짓밟히고 부스러졌던 나를 위해서.

매일 내 손을 씻을 때마다 피 냄새가 물 밑에서 올라오는 착각에 빠진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칼과 총을 닦는다.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눈발이 어느새 소복하게 쌓이면 나는 몰래 뒷문으로 나가 연회장 창문을 훔쳐본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표적이 앉을 위치를 확인한다. 밤이 되면 명동각의 긴 복도가 숨을 죽인다. 나는 촛불을 끄고 천천히 기도하는 척했다. 하지만 내 기도는 신에게 닿지 않는다. 내 기도는 오로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흔들리지 않고 수행하게 해달라는 것뿐.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그를 끝낼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허락된, 조용하고 뜨거운 일주일이다.

목요일 오후, 첫 눈발이 허공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쏟아지기 시작했다. 명동각 앞마당은 순식간에 희끗한 숨결을 뒤집어쓴 듯 변했고, 나는 그 위를 천천히 쓸며 표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빗자루 끝이 얼어붙은 땅을 긁을 때마다 사각사각, 죽은 겨울 풀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네 시가 가까워지고, 모임에 참석하러 온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모자를 털며 눈을 털어냈고, 누군가는 입김 속에서 파묻힌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럽게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긴 코트 자락 사이로 섞여드는 속삭임은 단순한 조우처럼 보였지만, 나는 그들 모두가 평범한 얼굴 뒤에 어떤 그림자를 가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에서 특채로 뽑혔다는 젊은 의학도, 제복을 단정히 여민 일본군 장교. 나는 그들의 뒤로 길게 끌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발이 없었고, 표정이 없었고, 단지 죽어 나온 얼굴들만 주르르 매달려 있었다. 그들 앞에서 죽어간 자들, 그리고 그들 손에서 앞으로도 사라질 이름 없는 눈동자들. 그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 달라붙듯 따라왔다.

연회장 문이 열리자, 등불의 황금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방 안에는 이미 술과 향수, 목재와 촛농의 냄새가 뒤섞여 둔탁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시종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모두 같은 회색 앞치마 차림에, 손에는 접시며 물병을 든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였다. 방 한가운데 놓인 긴 테이블 위에는 새로 채워진 포도주잔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들의 웃음은 낮았고, 속삭이는 목소리들은 서로의 귀에만 걸려 툭 떨어지듯 흘러갔다.

왼쪽 구석에서는 현악 사중주의 활이 천천히 움직이며 귓바퀴에 얇은 선을 긋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소리는 유리잔 벽을 스치듯 가늘었고, 첼로는 바닥을 더듬는 듯한 낮은 진동을 만들고 있었다. 그 진동을 따라 테이블 위의 물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나는 표적의 자리 뒤쪽에 섰다. 물병을 왼손으로 옮기고, 오른손은 앞치마 속에 숨겼다. 표적은 깔끔한 회색 정장 안주머니에서 금빛 단추를 한번 매만지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었다. 갓 스물이 넘었을까? 앳된 모습 때문에 그는 기병대 장교라기보다는 근처 고등학교 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술잔을 천천히 돌렸고, 창가 쪽에 있는 식물 장식의 잎이 그 손짓에 따라 가볍게 흔들렸다. 표적 옆에는 나이든 여인이 앉아 있었다. 고급 비단으로 만든 한복 차림에 보석 박힌 비녀를 꽂은, 우아한 귀부인이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그러나 작위까지 받은 고관댁 사모님을 내가 어디서든 만났을 리 없다. 그때 표적 옆에 앉아 있는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순간 그녀의 동공이 조금 넓어졌고, 나는 그 미세한 움직임으로 그녀도 나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접었다 펴는 작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앞치마 자락이 내 종아리를 스쳤다.

그녀가 물컵을 들어 보였다.

“물을 좀 주세요.”

작고 고른 목소리였다.

나는 병을 들어 물을 따랐다. 물줄기가 컵 벽을 따라 둥글게 돌며 잔을 채워갔다. 그녀는 컵을 잠시 쥐고 있다가 손끝으로 잔 가장자리를 한 번 톡 건드렸다. 그 움직임은 아무 생각 없는 일상의 몸짓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컵이 아닌 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여자는 표적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었고 무언가를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너무 다정해서, 생생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뚜렷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지나간 어떤 흔적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의 한 부분이었다.

‘설마!’

숨이 새고 들고 있던 접시가 힘없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접시는 바닥에 부딪혀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녀는 ‘창’의 엄마였다.

건물 밖에서 딱 하고 짧은 쇳소리가 들었다. 이어서 더 큰 쾅 소리가 창문 쪽으로 날아들었다. 유리창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산산이 떨어졌다. 파편들이 비처럼 떨어질 때, 현악기 연주는 한순간 공중에서 끊겨 사라졌다.

파편과 함께 나는 뭔가 둔한 충격을 느꼈다. 옆에 놓여 있던 접시가 튕겨 올라 내 팔과 어깨를 스쳤다. 접시 가장자리가 허공에서 굽어지며 나를 향해 쏟아졌고, 은 숟가락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짤랑 소리를 냈다. 그 충돌과 함께 얇은 선처럼 뜨거운 감각이 피부 위를 갈랐다. 나는 뒤로 반 걸음 밀렸다. 내 발끝이 바닥의 유리 조각을 건드렸고,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발밑에서 작게 울렸다.

나는 순간적으로 표적을 확인했다. 그의 테이블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표적의 것이 아니었다. 표적이 멀쩡한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총을 맞은 것은 표적 옆에 있던 여인이었다. 표적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그의 목에 비녀를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머리에 꽂고 있던 비녀를 빼려 했다. 그러나 팔을 뻗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내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했다.

표적은 순간적으로 주변을 훑더니 나에게 시선을 꽂았다. 그는 이미 자세를 낮춘 상태였고, 왼손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오른손으로는 식탁 모서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숨이 짧게 끊기는 사이,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바상.”

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는 손바닥으로 내 팔을 한 번 짚었다. 그 짚음은 아주 짧았고, 손가락 끝이 내 옷자락을 조금 당겼다 놓는 정도였다. 나는 그 손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동작을 멈춘 채 서 있었다. 바닥의 유리 조각이 그사이에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연회장의 촛불들은 바람이 드는 창문 틈 때문에 기울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소란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방 안을 빙글게 돌고 있었고, 현악 사중주 단원들은 악기를 가슴으로 안은 채 문 쪽으로 서서히 후퇴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어둠이 아무 말 없이 깔려 있었고, 그 안으로 총격의 잔향이 스며들듯,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표적의 얼굴을 응시했다. 보고 싶었던,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그의 얼굴. 표적은 나와 창의 아들이다.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어렸을 적, 나는 기생이었다. 권번 골목은 늘 비린 웃음과 연지 냄새로 가득했고, 나는 그 안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커갔다. 연회마다 불려 다니던 시절, 나는 그를 만났다. 문턱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던 남자. 검은 두 눈이 방 안의 연기를 가르듯 반짝이던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 인생을 바꿀 사람이라는 걸.

그는 의열단이었다. “창”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베어낸 사람. 나는 그의 곁에 서는 것이 죽음을 부르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도 숨쉬기가 편해졌다. 차분해지고 행복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려온 듯이.

사랑은 늘 조용하게 스며들고, 아침은 언제나 피비린내로 찾아왔다. 창을 따라 나는 비단치마를 벗어던지고, 음지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의열단의 은밀한 방에서 총의 무게를 배웠고, 칼을 쥘 때 손바닥에 생기는 얇은 떨림을 익혔다. 누군가는 여자가 총을 든다고 비웃었지만, 그 비웃음이 곧 공포로 바뀌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늘 짓밟히는 편이었고, 그래서 더 단단해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여자를 밀쳐내던 그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무기가 되었다. 여자의 몸은 가벼워서 숨어들기 좋았고, 미소는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경계하지 않았고, 나는 그 틈을 노렸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을 처음 마주했을 때, 심장은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마치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은 듯. 창은 말했다. “너는 너 자신을 과소평가해.”

그때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나는 더는 기생도, 연회의 장식도 아니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짓밟힌 시간이 나를 벼려냈고, 결국 나를 가장 조용하고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만들어놓았다.

밤이면, 권번에서 배우던 느린 춤사위가 몸에 되살아났다. 나는 그 움직임으로 어둠을 가르고, 그림자 사이로 스며들어 목표를 향해 다가갔다. 세상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 기생의 초례청에서 처음 노래하던 그 날부터 나는 누군가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창의 죽음을 전해 들은 것은 어느 해 여름 초입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창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젊은 여자였다. 사랑했던 남자는 의열단 일로 한밤중에 사라졌고, 시신도 찾지 못했다.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졌다.

내 품에 남은 것은 작은 울음뿐.

그 아이를 안았을 때의 따뜻함과 멍한 무게는 아직도 손바닥 안에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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