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엄마

by 영인


큰길에서는 한두 번 꺾어 들어가야 닿는 골목이었다. 종로 근처, 청계천과 가까운 탓에 여름에는 청계천에서 멱을 감아도 되는 곳, 일본인들이 사는 번듯한 거리와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갈라진 곳, 조선인들이 몰려 살던 낡은 한옥들이 서로의 등을 밀어내듯 붙어 있었다. 낮이면 장사꾼의 목청과 아이들 웃음이 엉켜 골목을 채웠고, 밤이 되면 거짓말처럼 소리가 가라앉았다.

1938년, 나는 여덟 살이었고 그 골목 끝방에서 엄마와 살고 있었다. 나를 낳아준 엄마는 명동클럽 나이트 쇼에서 춤을 추는 댄서, 하나코. 밤마다 향수와 담배 냄새를 데리고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둘만 있을 때에도 엄마라고 부르면 야단을 맞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하나코상이라고 불러야 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하나코도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항상 ‘아키라’라고 이름을 불렀다.

매달 한 번, 하나코는 나를 데리고 화신 백화점으로 갔다. 2층 가발 진열장 앞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한명수다. 하나코는 내가 한명수를 쏙 빼닮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눈빛과 번들거리는 이마, 얇게 꾹 다문 입술은 아무리 봐도 내 얼굴과 닮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름 대신 한 달이라고 불렀다. 사람보다는 날짜에 가까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 달은 하나코를 만날 때마다 아무렇지 않게 가족 이야기를 했다. 마누라가 친정에 갔다느니, 아이가 열이 났다느니, 그런 말들을 마치 날씨 이야기처럼 꺼냈다. 나는 그때마다 가발 가게 옆 구석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 보며 딴청을 피웠다.

하나코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늘 고개를 들고 걷는다. 좁은 골목에서도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비킨다. 그런데 한 달 앞에만 서면 어깨가 조금 내려간다. 말투도 달라진다. 한 달이 물건을 훔쳐 오라면 훔쳐 오고, 돈을 가져오라면 아끼던 반지까지 팔아온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한 달이 ‘순예’라는 사람을 감시하라고 한 뒤부터, 거의 매일 나를 데리고 근처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늘 소독약 냄새가 났고, 바닥은 차가웠다. 하나코는 내 손을 꼭 잡고 접수대 근처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돌아온 후에는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한 달을 만날 때마다 그 노트를 건네주었다.

“김 순예, 그년 월척이야. 독립군 자금을 전달하는 연락책이지.”

언젠가 한달이 순예에 대해 설명했는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코가 순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목소리를 낮추었고, 그 이름이 나오면 주위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는 것만 느꼈다. 한달은 담배를 길게 빨았고, 불은 끝까지 태우지 않은 채 비벼 껐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순예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코의 손에 끌려 병원에 가면, 순예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흰 옷을 입고 있었고, 걸음이 빠르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환자 옆에 서 있을 때도, 기록을 들여다볼 때도, 고개를 많이 숙이지 않았다. 하나코는 순예를 발견하면 숨을 조금 늦추거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마다 나는 이유 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우리는 병원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진료를 받는 척하다가, 약을 타는 척하다가, 순예가 다른 쪽으로 사라지면 바로 나왔다. 하나코는 병원 안에서는 나에게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통해 방향을 알려주었다. 멈춰야 할 때는 손을 누르고, 움직여야 할 때는 당겼다. 나는 그 손짓을 잘 따랐다.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복도에서 순예와 아주 가까이 스쳤다. 나는 순예를 올려다보았고, 순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차분했다. 불안도 경계도 없었다. 마치 나를 어른처럼 보는 것 같았다. 순예의 시선이 하나코로 옮겨갔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하나코가 내 손이 부서져라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병원을 나와 골목으로 들어서자 하나코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내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물었다. 왜 자꾸 병원에 오느냐고. 하나코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파보여서. 하지만 그 웃음은 집에서 보던 웃음과 달랐다. 집에 돌아와서 하나코는 술을 마셨고, 그날 밤에는 여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오래 보았다.

한 달을 만나고 온 저녁이면 술을 마시며 하나코는 낮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노래에는 여우가 나온다. 달이 뜨고, 불이 켜지고, 돌아가지 못하는 여우 이야기다.

나는 어느 날 그 노래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하나코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술잔을 내려놓고 키츠네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여우는 사람의 모습으로 마을에 섞여 살고, 기생, 무희, 하녀, 아내 같은 자리로 사회 안에 스며들고, 이름을 얻고, 관계를 만들고, 아이까지 낳지만 사람 곁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이름을 들키면 돌아가야 하고, 불이 켜지면 길을 따라 사라진다고. 그래서 여우는 늘 밤에만 오고,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진다고 했다.

“달 뜨면 나는 잊고 / 불 켜지면 길이 열려

부르지 마, 돌아보면 / 아이만 남고 여우는 가.”

“그럼 여우는 왜 노래를 불러?”

내가 묻자 하나코는 고개를 저었다.

“여우는 노래 안 해. 노래는 남은 사람이 부르는 거야.”

하나코는 다시 술을 마셨고, 노래는 점점 작아졌다. 마지막 가사는 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삼키는 것처럼. 그러고 나면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줄줄이 이어졌고, 연기는 방에 얇게 깔렸다. 담뱃불을 붙일 때 마다 하나코는 자개 성냥갑을 꺼냈다.

하나코의 자개 성냥갑은 손바닥만 했고, 닫힐 때마다 얇은 소리가 났다. 겉면에는 조개껍질이 박혀 있어 빛을 받으면 색이 바뀌었다. 낮에는 우윳빛이었고, 밤에는 푸른빛이 섞였다. 그녀는 담배를 피울 때도 성냥갑을 함부로 두지 않았다. 늘 같은 주머니에 넣었고, 꺼낼 때는 잠깐 손으로 문질렀다. 그 버릇을 나는 오래 지켜봤다.

내가 그 성냥갑을 좋아한 건 불 때문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무늬가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울이면 다른 그림이 나타났고, 다시 사라졌다. 마치 하나코의 얼굴 같았다. 웃다가도 금방 사라지고, 다른 얼굴이 되는 것. 나는 성냥갑을 쥐고 있으면 하나코를 조금 이해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몰래 만졌고, 오래 들여다봤다. 불을 켜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코의 비밀을 손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어느 날 나는 혼자 그 성냥갑을 열었다. 자개 무늬가 빛을 받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서, 손끝으로 따라가다 성냥을 하나 꺼냈다. 긁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고, 불은 너무 쉽게 붙었다. 놀라 손을 떼는 순간 불씨가 오른팔에 닿았다. 살 타는 냄새가 나고 뜨끔한 고통이 찌르듯 밀려들었다. 내 비명소리를 듣고 하나코가 달려왔다.

하나코는 나를 안아 들었다.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인 숨이 바로 귀 옆에서 흔들렸다. 밖으로 뛰어나가는 동안 하나코는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불렀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 얼굴을 적셨다. 병원 문을 밀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우왕좌왕하는 하나코 앞으로 순예가 마주 나왔다.

“아기 엄마, 애 이리 주세요.”

순예가 몇 번이나 말 한 후에야 하나코는 정신이 든 눈치였다. 순예는 나를 받아 안았다. 하나코의 품에서 순예의 품으로 옮겨지는 사이, 세상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치료실 안은 밝았다. 일본인 의사가 하나코에게 뭔가를 설명했고 그 옆에서 순예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물로 씻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물론 그래도 상처는 아팠고 나는 훌쩍였다. 하나코는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순예앞이 불편한지 고개를 외로 꼬고 서 있었다. 순예는 붕대를 감으며 간단히 설명했고, 하나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래된 침묵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치료가 끝나자 순예는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제야 하나코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순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찍 오셔서 다행이에요. 금방 낫겠어요. 치료만 잘 하면.” 인사는 짧았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 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마치 길고 긴 목적지의 끝이 같은 방향이라는 것을 잠깐 확인한 사람들처럼.

병원을 나설 때, 하나코는 순예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거리에서 스치는 인사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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