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는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by 영인

나는 오래도록 감정을 바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운해도 웃었고, 기뻐도 조용히 넘겼고, 사랑한다는 말은 늘 조금 늦게 꺼냈다. 어떤 감정은 말할 타이밍을 놓쳤고, 어떤 감정은 말할 용기를 끝내 얻지 못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 감정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았으니 지나간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나가지 않았다.
지나간 줄 알았던 감정들은 다른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았고, 어느 날은 아주 사소한 말에 오래 흔들렸다. 상대는 이미 잊어버린 장면인데, 나만 그 말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건 지금의 일이 아닌데.’
지금의 감정 같지 않은 감정. 너무 오래된 느낌의 감정.
돌이켜보면, 나는 감정을 말하지 않는 대신 보관하는 사람이었다. 서랍에 넣어두듯 마음속에 밀어 넣었다. 그때는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이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은 물건이 아니어서, 가만히 두면 먼지만 쌓이는 식으로 남지 않았다. 그 감정들은 조용히 모양을 바꿨다.
말하지 못한 서운함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습관이 되었고, 말하지 못한 사랑은 늘 조금 늦게 다가가는 태도가 되었다. 붙잡지 못한 순간들은 어떤 장면 앞에서 늘 망설이게 만드는 힘이 되었다. 나는 그걸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래된 감정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
어떤 인물을 쓰다가 이유 없이 멈칫할 때가 있었다. 그 장면은 허구인데, 감정만은 낯설지 않았다. 인물이 떠나는 장면을 쓰는데 손이 자꾸 느려졌다. 붙잡지 못하는 장면을 쓰는데, 자꾸 문장이 길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이건 이야기가 아니라 내 감정이구나.
우리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숨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많은 것을 들킨다. 직접 말하지 않은 감정들이 문장 사이로 스며 나온다. 설명하지 않은 과거가 인물의 선택으로 나타나고,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서술의 온도로 남는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지만, 작가는 그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을 꺼내 놓는다.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나면, 이상하게 숨이 조금 편해지는 순간을 여러 번 겪었다. 해결된 것도 없고, 상황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 감정은 그제야 비로소 말을 얻은 것이었다. 직접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 다른 문장을 빌려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몸으로 가고, 습관으로 가고, 글로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선택 속으로 간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유독 조심스러운 이유, 어떤 상황에서 늘 같은 방식으로 물러나는 이유, 어떤 순간에 설명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 그 대부분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말해지지 못한 감정들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감정을 잘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때그때 털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감정을 다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감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왜 이 장면에서 오래 멈추는지, 왜 어떤 기억은 유난히 또렷한지, 왜 어떤 말을 끝내 꺼내지 못했는지. 그걸 알아보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끌고 다니지 않는다. 나는 비로소 그 감정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서 살아가며, 때로는 문장이 되고, 때로는 선택이 되고, 때로는 침묵의 이유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준비되었을 때,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감정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질 자리를 기다리는 것.
그래서 오늘도 쓰는 사람으로 남는다.
언젠가 말하지 못한 것들을, 다른 문장으로라도 건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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