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떨기 Jun 03. 2024

59.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그리고 어김없이 이런 순간엔 무리하고 싶어지니까.




혜은의 밀린 일기


작년 5월 마지막 날에 쓴 일기를 보았다. 


계획한 일들이 뜻대로 흘러간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해내려 하지 말고 그럴수록 작은 일상을 지켜내라는 조언. 종종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좀 더 오래 자고, 잘 걷고, 이왕이면 걷기 말고도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말이, 일기장에 구획된 칸을 넘어서 긴 메모로 덧붙여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과거의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서. 마침 에고서칭을 하다가 ‘윤혜은 작가는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척 수고스러운 것 같은 사람이기는 한데, 그러나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로운 자신을 꽤나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니 10년 일기장을 하루도 빠짐없이 채워나갔던 거겠지.’란 후기를 본 참이었다.


과연 나는 그렇구나 싶어서. 물론 이건 그가 전작들을 사려 깊게 읽어준 탓이겠지만, 모르는 누군가에게 정확히 간파 당했다는 생각, 그리고 이번 생을 함께 하게 된 나와 제법 잘 지내고 있다는 희미한 확신이 한데 섞여 종일 밖에 있어 고단했던 밤도 달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런 순간엔 무리하고 싶어지니까. 과거의 나는 당부해둔 거겠지. 침착하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머물러 지켜야 할 것들에 좀 더 에너지를 나누라고. 


마침 요즘의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있다. 딱히 거창한 다짐 없이, 자연히 취침 시간이 당겨지고 있다. 머리보다 몸이 일기를 기억하고 있던 것일까? 덕분에 이른 아침에 의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 긴가민가하며 시작한 복싱에 완전히 감겨버려서 센터가 쉬는 주말이 아까울 정도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양 팔에 힘을 주면 미세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근육을 보는 재미가 나에게도 오는 구나. 머리를 짜내고, 마감일을 지키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타임라인 바깥의 일상에 더해지는 새로움들이 나는 조금 놀랍다. 밖으로 드러나고 모두와 나누는 일상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만 알고 있는 만큼 변화하고 있는 요즘이. 


날씨 좋은 토요일. 서울식물원 산책을 가기 전 첫 번째로 뽑은 타로카드에는 친구들과 끝장나게 놀고 있는 여자 셋이 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완전하다고 웃음을 터트리던 마스터 선생님의 못 말리겠다는 표정과 머쓱하게 따라 웃는 나와 친구들이 놓인 장면 또한, 오랫동안 쌓은 일기가 활짝 펼쳐진 것 같았다. 

한편, 그토록 완전한 나날 속에서도 스멀스멀 피어나는 사랑스러운 예언은 앞으로 어떤 일기가 될까. 앞으로 해내야 많은 할 일들보다도, 나는 요즘 그런 것들이 궁금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매거진의 이전글 58. 일기떨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