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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y 16. 2021

15. 홀로 이 유랑하는 난춘(亂春)

부산타워

마지막 하루를 앞두고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참 많이 고민했었다. 어쩌면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영영 빠져버리게 되는 것일까, 가는 시간이 아까워 핸드폰을 열어 그동안 지나온 흔적들을 곱씹어 본다. 그때 마주했던 공간과 스쳐 지나갔던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코끝을 짙게 간지럽히는 흙내음 내지 이름 모를 풀꽃 냄새 아마 시간이 아주 흐른 뒤에 희미하게나마 머리 내지 마음속에 남아 있을까? 내내 시끄러운 머릿속을 달래고 잠을 청했다.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 그리고 이제 정말로 마지막 밤을 보낼 부산으로 떠나야 했다.


고요한 잿빛과도 같은 시간 속에서 기억조차 잃어버린 꿈을 꾸었다. 

곧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릴 꿈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새 또 짐이 늘었나 어깨에 짊어진 두툼한 가방이 조금은 버거웠다. 미니멀하게 여행하자 했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나보다. 


부산의 날씨는 따뜻했다. 예약한 호텔에 다다랐지만, 체크인 시간이 꽤 남았다.

당장에 갈 곳이 없었고, 주변에 카페 하나 없었다. 혼자 길거리에 남겨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장에 짐은 무거웠고 나는 의자가 정말로 필요했다. 여행 내내 쌓여있던 피로가 순간 발 언저리로 모이는 느낌이 들자 발바닥은 이내 불 바닥을 걷는 느낌이었다. 소득 없이 호텔 주변만 끙끙거리며 기웃거렸지만 나를 봐주는 이는 없었고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으니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의자 없이 간이 식탁만 달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크기도 꽤 작아 오래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지금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못 먹어도 고! '염치없이 물 하나만 사고 30분 동안 있겠습니다.' 작게 속으로만 생각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창밖을 쳐다봤다의 반복. 시간이 멈추었나 싶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재미없는 핸드폰을 고이 접고 커다란 창밖으로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딛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고 간혹,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아마 잃어버린 길을 찾으려 잠시 멈춰 선 것 일 테지. 아마 여행 내내 나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초조했을 것이다. 이마에 '여기가 어딘가요'라고 써 붙여 다녔을 테지. 그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던 몇몇 사람들은 내게 친절했으며, 내가 지났던 길들은 내내 설레다가도 잠시 마음 아프다가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늦은 저녁 예약된 연극을 보러 가기 전 부산타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밤을 마주하기 전 도착해야 비로소 야경을 볼 수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가는 내내 날씨가 따뜻했다. 추운 바람이 늦겨울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봄이 찾아왔나 싶을 정도였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선택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지도를 보며 걷다 도달한 언덕길을 오르며 외투를 벗을 정도의 무더움을 느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이내 넓은 공원으로 들어섰다. 


서서히 밝아오는 부산타워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변 벤치에 앉아 한참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다, 조금 젖어있던 앞머리를 스쳤다. 잠시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본다. 무엇을 생각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주변을 지나는 사람과, 형형색색 빛나는 타워의 전경을 바라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질 무렵 표를 끊고 들어섰다.

아직 푸르스름한 저녁, 한순간 밤은 찾아온다. 노을은 쉬이 떠나질 않고 바다 끝 언저리를 맴돌지만 무심한 시간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밤을 맞이하게 한다. 사진을 몇 장 찍는 새, 어두워진 부산은 반짝거리는 별처럼 타워 아래를 수놓았다. 



발끝에 수놓아진 수많은 불빛을 보며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물론 나도 그 안에서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큼 좀처럼 담기질 않아 이내 포기했다. 끝없는 불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심은 꺼지지 않는 불빛을 밤새 내비친다. 그 모습이 끝없이도 처연히 아름답다. 그 끝에 이름 모를 아쉬움 정도가 내내 옮겨붙는다.


한차례 스쳐 지나갔었던 모든 곳이 두서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떠올렸지만, 뚜렷한 형체가 아닌 이름 모를 풀꽃 향기, 가만히 불어오던 바람, 창가에 어른거리는 무엇인가를 희미한 실루엣처럼 떠올렸다.


배우들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를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1열의 연극을 뒤로한 채, 숙소로 향했다. 들어오자마자 오후 내 쳐놨었던 커튼 사이로 다시 한 차례 도심의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의 야경을 침대에 걸터앉아 씻지도 않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쉬움 때문일까, 쉬이 잠이 들지 않는 밤이 지난 어느 날.

내내 기억될 여행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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