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 픽션들

by 세인트
XL.jpg 민음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시간'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만든다. 우리의 관념 속 시간은 대개 선형이다. 오전이 지나면 오후가 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후회도 그 선 위에 놓인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르게 했을 텐데'라는 말은 언제나 이미 지나간 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 선을 너무 태연하게 접어버린다. 마치 종이접기처럼 접힌 선이 평면의 종이를 입체의 모양으로 만들듯, 그는 선형의 시간을 접어 길이 아닌 '구조'를 만든다. 이처럼 길이 구조가 되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흐름이 아니라 '배치'가 된다. 이때 우리는 아주 불편한 깨달음과 마주한다. 어쩌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보르헤스의 소설은 대체로 차갑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뚫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집중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향으로 기억을 깨웠다면, 보르헤스는 종이 위의 도식과 상상 속의 기하학으로 시간을 깨운다. 그래서 보르헤스를 읽고 나면 감동보다 먼저 방향 감각이 흔들린다. 마치 익숙한 도시에서 갑자기 길 안내 표지판이 바뀌어버린 것처럼, 내가 걷는 것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혹은 '가능한 과거'들 중 하나인지 모호해진다. 그 모호함이 바로 보르헤스가 설계한 시간이다.


가장 유명한 문은 <갈래의 정원>에서 열린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무들은 다 비슷해 보이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며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그때 본능적으로 한 방향을 찾는다. 어느 쪽으로든 계속 가면 길이 나오리라 믿는 것이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숲은 다르다. 이 숲에서는 방향을 찾는 행위 자체가 시간에 대한 오해가 된다.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 그 선택이 한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무너진다. 선택은 결과를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은 결과를 여러 갈래로 만들고, 그 갈래들은 동시에 존재한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에서 시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간은 수많은 미래의 무한한 계열로 분기하며, 그 계열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증식한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당신이 하지 않은 선택은 정말로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사랑을 잃었다고 말하고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며 한 번의 말실수로 관계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 문장들은 모두 직선 위에서만 성립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묻는다. 만약 시간에 갈래가 있다면 어떨까.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어떠한가.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다른 시간 속에서는 우리 둘 다 존재한다.'


내가 희미하게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떠올릴 때마다 그 상상은 단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현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질문이 무서운 이유는 분명하다. 후회가 위로가 아니라 공포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는 말은 우리를 달래는 대신 우리가 버린 길들이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보르헤스는 여기서 시간의 윤리로 우리를 몰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선택을 조심하라' 같은 교훈은 없다. 대신 그는 시간의 구조를 제시하고 독자 스스로 그 안에서 선택하게 만든다. 사소한 결정들, 오늘 어떤 길로 돌아갈지, 어떤 말을 삼키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같은 고민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 무게는 도덕이 아니라 가능성 때문에 생긴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지는 순간 오히려 가벼워지지 못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쉽게 끝없는 미로로 바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르헤스의 미로는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미로를 단순한 감옥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미로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종류의 빛을 믿는다. 길이 하나일 때는 보지 못하는 빛, 갈래가 많을 때만 생기는 빛이다. 그 빛은 진실이라기보다 통찰이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 얼마나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는지 보르헤스는 그 장막을 거두어버린다.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시간이 갈래를 만들 수 있다면 시간은 멈출 수도 있을까.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은 멈춘 시간이라는 상상을 가장 냉정하게 다루는 작품이다. 사형을 앞둔 작가 흘라디크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희곡을 완성하기 위해 단 하루의 시간을 기도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완성은 그저 성취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무너진 채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지막 품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시간이 모자라다. 삶은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끝나기 전에 종결된다. 기적은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 일어난다.


'물리적 세계는 정지했다. 독일군 병사들의 동작은 박제된 것처럼 멈추었고, 허공의 총알조차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기적처럼 시간이 멈춘다. 바깥세상은 그대로 정지하고 내면의 세계만 길게 펼쳐진다. 이때 보르헤스가 겨누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 속의 시간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시계의 1분이 언제나 같은 1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1분은 지나치게 짧고 어떤 1분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길다. 기다림의 1분, 작별의 1분, 절박한 1분은 한없이 늘어난다. 반대로 행복의 1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 보르헤스는 그 불균형을 정면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정말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인가.


어떤 사람에게 삶은 더 많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도착하는 것이다. 어떤 문장을 끝까지 쓰는 것, 어떤 의미를 끝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멈춘 시간 속에서 머릿속으로 희곡의 마지막 구두점을 찍는다. 그러니 시간은 단순히 양이 아니라 밀도이며 완성의 가능성이다.


나의 글도 시간의 문장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것은 시간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점이다. <비밀의 기적>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간이 멈춘다면 인간은 구원받는가, 혹은 더 잔인해지는가. 멈춘 시간은 희망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오래 고통받을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그 경계를 흔든다. 여기서 그의 차가움이 다시 드러난다. 그는 비극을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의 문장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떤 운명은 한두 문장으로 지나간다. 독자는 그 짧은 문장에 더 크게 얻어맞는다. 감정은 풍부한 설명보다 잘린 문장 사이에서 더 크게 일어난다. 보르헤스의 문장들은 설명이 아니라 빈칸으로 독자를 움직인다.


그 빈칸은 시간과 닮았다. 시간이란 결국 일어난 일을 빼곡하게 채워놓는 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사라진 것들의 자리, 말하지 못한 것들의 공백, 잃어버린 것들의 빈칸으로 존재한다. 보르헤스는 시간을 그 공백으로 드러낸다.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는 멈춘 시간보다 더 무서운 시간을 보여준다. 너무 많이 기억하는 시간, 즉 망각이 사라진 시간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으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본 풍경의 디테일, 지나간 순간의 느낌, 그때의 빛과 공기의 온도까지 모두 기억한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기억은 쓰레기 하차장과 같다.'


우리는 보통 기억을 보관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상자 같은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푸네스의 기억은 보관이 아니라 범람이다. 기억이 너무 많으면 현재가 무너진다. 현재는 망각 위에 세워지는 얇은 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많은 것을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리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려야 중요한 것이 남는다. 그 편집이 곧 의미가 된다. 그런데 푸네스는 편집하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동일한 선명도로 남아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 의미는 의미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대비에서 생기고, 대비는 삭제에서 생긴다. 보르헤스는 푸네스의 입을 빌려 기억의 비극을 선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삭제가 없는 삶은 흑백의 차이가 사라진 삶과 같다. 빛이 넘치면 오히려 눈이 멀듯이, 기억이 넘치면 오히려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은 앞서 다룬 작품들에 비해 역설적이다. 프루스트의 시간은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잊은 줄 알았던 시간이 마들렌느 향기 하나로 부활한다. 그 장면은 아름답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묻는다. 만약 모든 것이 계속 살아 있다면 어떠한가. 만약 시간이 전혀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삶은 아름답기보다 질식에 가까워질 것이다. 어떤 감정은 잊혀야만 다음 감정이 들어올 수 있다. 어떤 상처는 무뎌지거나 아물어야만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망각은 시간의 적이 아니라 시간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푸네스의 기억은 결국 인간성을 빼앗는다. 인간은 지나간 것을 지나가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그 능력이 없는 푸네스는 말 그대로 시간에 갇힌 인간이 된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과거에 붙들려 현재를 잃는다. 망각은 죄가 아니라 구원일 수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다시 도서관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도서관은 기록이 모인 공간이자 시간의 저장고다. 그러나 저장고가 너무 커지면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은 그 공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모든 책이 존재한다면 진실도 존재하지만 거짓도 무한히 존재한다. 정답이 무한히 있다면 정답은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가능한 시간이 무한히 많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나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결국 보르헤스의 시간은 이렇게 정리된다. 시간은 부족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너무 많아서 더 괴롭다. 인간은 한 사람의 생이라는 좁은 그릇을 가지고 무한을 상상하려 한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문장은 아름다우며 냉정하다. 아름다움에 소름이 돋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이 책은 시간의 문장을 모아 그 작품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를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보르헤스는 단지 한 챕터의 작가가 아니라 이 글이 택한 주제 전체의 관점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가다. 보르헤스는 시간을 감정이나 사건으로만 다루지 않고 시간 그 자체의 구조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는 믿음 대신 시간은 분기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늘어나고, 과잉으로 붕괴하며, 도서관처럼 쌓인다. 그리고 그 쌓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앞서 살펴본 작가들에 비해 보르헤스에 대해 긴 글을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울프의 <등대로>가 파도처럼 흔들리는 의식의 시간을 보여줬다면, 보르헤스는 그 파도 아래의 해류를 보여준다. 흐름이 아니라 설계이며,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하지만 그 구조가 끝내 가리키는 것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작은 존재가 그럼에도 어떻게 의미를 만들려 애쓰는지 보여준다.


나는 이 장을 보르헤스식 결말로 조금 명확하게 닫고 싶다. '시간은 길이 아니라 미로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친절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슬쩍 암시한다.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라고. 앞으로도, 옆으로도,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어떤 길은 내 길이 되고 어떤 길은 버린 길이 된다. 그러나 버린 길이 완전히 사라지는지 혹은 어딘가에서 계속되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단정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도서관은 무한하고 주기적이다. 만약 어떤 여행자가 어느 방향에서든 도서관을 가로지른다면, 그는 몇 세기 후에 똑같은 책들이 똑같은 무질서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단정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보르헤스가 시간을 다루는 가장 정직한 방식인지 모른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너무 쉽게 단정한다. "지나갔다", "끝났다", "잊혔다"라고. 보르헤스는 그 단정들을 흔든다. 그리고 흔들린 자리에서 독자는 나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놓친 문장, 내가 지나친 계절, 내가 잊었다고 생각한 얼굴들이다. 그것들이 정말 사라졌는지 아니면 다른 갈래에서 아직 살아 있는지 묻게 만든다. 그 질문이 남는 한 보르헤스는 성공한 것이다. 그의 문학은 답을 주지 않지만 질문을 바꾼다. '시간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믿고 있었는가?'라고. 그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시간의 문장을 읽을 준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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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는‘시간’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만든다. 우리의 관념 속 시간은 선형이다. 오전이 지나면 오후가 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후회도 그 선 위에 놓인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르게 했을 텐데,라는 말은 언제나 '이미 지나간 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 선을 너무 태연하게 접어버린다. 마치 종이접기처럼 접힌 선이 평면의 종이를 입체의 모양으로 만들듯 선형의 시간을 접어 길이 아닌 아니라 '구조'를 만든다. 이처럼 길이 구조가 되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흐름’이 아니라 ‘배치’가 된다. 그때 우리는 아주 불편한 깨달음과 마주한다. 어쩌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보르헤스의 소설은 대체로 차갑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뚫고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집중에서 온다.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느의 향으로 기억을 깨웠다면, 보르헤스는 종이 위의 도식과 상상 속의 기하학으로 시간을 깨운다. 그래서 보르헤스를 읽고 나면 감동보다 먼저 방향감각이 흔들린다. 마치 익숙한 도시에서 갑자기 길 안내 표지판이 바뀌어버린 것처럼. 내가 걷는 게 ‘현재’인지 ‘과거’인지, 혹은 ‘가능한 과거들’ 중 하나인지 애매해진다. 그 애매함이 바로 보르헤스의 시간이다.


가장 유명한 문은 <갈래의 정원>에서 열린다.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무들은 다 비슷해 보이고, 바람은 사방에서 불고,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그때 본능적으로 ‘한 방향’을 찾는다. 어느 쪽으로든 계속 가면 길이 나오리라 믿는다. 그런데 보르헤스의 숲은 다르다. 이 숲에서는 방향을 찾는 행위 자체가 시간에 대한 오해가 된다.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 그 선택이 한 가지 결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무너진다. 선택은 결과를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선택은 결과를 여러 갈래로 만든다. 또 그 갈래들은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당신이 하지 않은 선택은 정말로 사라졌을까?”하는 질문을 한다. 우리는 사랑을 잃었다고 말하고,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고, 한 번의 말실수로 관계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 문장들은 모두 직선 위에서만 성립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묻는다. 만약 시간에 갈래가 있다면?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내가 희미하게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떠올릴 때마다, 그 상상은 단지 허공의 공상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현실일 수도 있다면? 이 질문이 무서운 이유는 분명하다. 후회가 위로가 아니라 공포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는 말은 우리를 달래는 대신, 우리가 버린 길들이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여기서 시간의 윤리로 우리를 몰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선택을 조심하라’ 같은 교훈은 없다. 대신 그는 시간의 구조를 제시하고, 그 안에서 독자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다. 사소한 결정들, 오늘 어떤 길로 돌아갈지, 어떤 말을 삼켜야 하며,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 무게는 도덕이 아니라 가능성 때문이다. 가능성이 너무 많아지는 순간 오히려 가벼워지지 못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쉽게 ‘끝없는 미로’로 바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르헤스의 미로는 절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미로를 '감옥'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미로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종류의 빛을 믿는다. 길이 하나일 때는 보지 못하는 빛. 갈래가 많을 때만 생기는 빛. 그 빛은 ‘진실’이라기보다 ‘통찰’에 가깝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 얼마나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는지. 보르헤스는 그 가림막을 찢는다.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시간이 갈래를 만들 수 있다면, 시간은 멈출 수도 있을까?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은 ‘멈춘 시간’이라는 상상을 가장 냉정하게 다루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어떤 존재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단 하나의 완성을 꿈꾸는 이야기. 여기서 ‘완성’은 그저 성취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무너진 채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품위라고 할 수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시간이 모자라다. 삶은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끝나기 전에 종결된다. 그러니 그는 기도한다. 딱 한 번만 시간을 더 달라고. 단 한 순간만 늘려달라고.


그리고 기적처럼 시간이 멈춘다. 바깥의 세계는 그대로 정지하고, 내면의 세계만 길게 펼쳐진다. 이때 보르헤스가 겨누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라, ‘의식의 시간’이다.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시계의 1분이 언제나 같은 1분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1분은 지나치게 짧고, 어떤 1분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길다. 기다림의 1분, 작별의 1분, 목이 타는 1분은 한없이 늘어난다. 반대로 행복의 1분은 왜 그렇게 빨리 끝나는가.


보르헤스는 그 불균형을 정면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정말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인가. 어떤 사람에게 삶은 더 많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도착'하는 것이다. 어떤 문장을 끝까지 쓰는 것, 어떤 사랑을 끝까지 말하는 것, 어떤 의미를 끝까지 이해하는 것. 그러니 시간은 단순히 양이 아니다. 시간은 밀도다. 시간은 '완성의 가능성'이다.


나의 이 글도 ‘시간의 문장’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것은 '시간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이다. <비밀의 기적>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간이 멈춘다면 인간은 구원받는가, 혹은 더 잔인해지는가. 멈춘 시간은 희망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더 오래 고통받을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그 경계를 미세하게 흔든다. 그리고 여기서 보르헤스의 차가움이 다시 드러난다.


그는 비극을 길게 묘사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의 문장을 늘어놓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운명은 한두 문장으로 지나간다. 독자는 그 한두 문장에 더 크게 얻어맞는다. 감정은 풍부한 설명보다 잘린 문장 사이에서 더 크게 일어난다. 보르헤스의 문장들은 종종 그런 방식으로 독자를 몰아간다. 설명이 아니라, 빈칸으로.


그 빈칸은 ‘시간’과 닮았다. 시간이란 결국, 일어난 일을 빼곡하게 채워놓는 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간은 사라진 것들의 자리, 말하지 못한 것들의 공백, 잃어버린 것들의 빈칸으로 더 강하게 존재한다. 보르헤스는 시간을 그 공백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다음 문으로 가면, 그는 멈춘 시간보다 더 무서운 시간을 보여준다.'“너무 많이 기억하는 시간', 즉 망각이 사라진 시간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으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에 대한 형벌처럼 느껴진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본 풍경의 디테일, 지나간 순간의 느낌, 그때의 빛과 공기의 온도까지. 우리는 보통 기억을 ‘보관’이라고 생각한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상자. 그러나 푸네스의 기억은 보관이 아니라 범람이다. 기억이 너무 많으면, 현재가 무너진다.왜냐하면 ‘현재’는 망각 위에 세워지는 얇은 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는 대부분을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리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려야 중요한 것이 남는다. 그 편집이 곧 ‘의미’가 된다. 그런데 푸네스는 편집하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동일한 선명도로 남아, 의미가 드러나지 못한다. 의미는 상대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대비에서 생기고, 대비는 삭제에서 생긴다. 삭제가 없는 삶은 흑백의 차이가 사라진 삶처럼 된다. 빛이 넘치면 오히려 눈이 멀 듯이, 기억이 넘치면 오히려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작품이 나의 이 책에서 일종의 '역설적의 장치'가 되리라 믿는다. 프루스트의 시간은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잊은 줄 알았던 시간이 향기 하나로 부활한다. 그 장면은 아름답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말한다. 만약 모든 것이 계속 살아 있다면? 만약 시간이 전혀 죽지 않는다면? 그때 삶은 아름답기보다 질식에 가까와질 것이다. 어떤 감정은 잊혀야만 다음 감정이 들어올 수 있다. 어떤 상처는 무뎌지거나 아물어야만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망각은 시간의 적이 아니라, 시간의 조건일지도 모른다.


푸네스의 기억은 결국 인간성을 빼앗는다. 인간은 ‘지나간 것’을 지나가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그 능력이 없는 푸네스는, 말 그대로 '시간에 갇힌 인간'이 된다. 그는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는 끝없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과거에 붙들려 현재를 잃는다.

망각은 죄가 아니라 구원일 수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보르헤스는 다시 ‘도서관’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도서관은 기록이 모인 공간이다. 기록은 시간의 저장고다. 그러나 저장고가 너무 커지면,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혹은 유사한 도서관 모티프들)은 그 공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모든 책이 존재한다면, 진실도 존재하지만 거짓도 무한히 존재한다. 정답이 무한히 있다면, 정답은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가능한 시간이 무한히 많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나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결국 보르헤스의 시간은 철학적으로 이렇게 정리된다. 시간은 부족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너무 많아서 더 괴롭다. 인간은 ‘한 사람의 생’이라는 좁은 그릇을 가지고 무한을 상상하려 한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문장은 늘 아름답지만, 동시에 서늘하다. 아름다움이 서늘해지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진짜 얼굴을 본다.


이 책은 '시간의 문장'을 모아 그 작품에서 시간이 갖는 의미를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보르헤스는 단지 ‘한 챕터의 작가’가 아니라, 이 글이 택한 주제 전체의 관점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가다. 왜냐하면 보르헤스는 시간을 ‘감정’으로도, ‘사건’으로도만 다루지 않고, 시간 그 자체의 구조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른다,라는 믿음 대신, 시간은 분기한다. 시간은 늘어난다. 시간은 과잉으로 붕괴한다. 시간은 도서관처럼 쌓인다. 그리고 그 쌓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앞서 살펴본 작가들에 비해 보르헤스에 대해 긴 글을 쓰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울프의<등대로>가 파도처럼 흔들리는 의식의 시간을 보여줬다면, 보르헤스는 그 파도 아래의 해류를 보여준다. 흐름이 아니라 설계. 감정이 아니라 구조다. 하지만 그 구조가 끝내 가리키는 것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작은 존재가 그럼에도 어떻게 의미를 만들려 애쓰는지.


그래서 나는 이 장을 이렇게 닫고 싶다. 보르헤스식 결말로, 조금 차갑고, 조금 명확하게. 시간은 길이 아니라 미로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친절하게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슬쩍 암시한다.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라고. 앞으로도, 옆으로도,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어떤 길은 ‘내길’이 되고, 어떤 길은 ‘버린 길’이 된다. 그러나 버린 길이 완전히 사라지는지, 혹은 어딘가에서 계속되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단정하지 않는다.


단정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보르헤스가 시간을 다루는 가장 정직한 방식인지 모른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너무 쉽게 단정한다. 지나갔다는 말, 끝났다는 말, 잊혔다는 말. 보르헤스는 그 단정들을 흔든다. 그리고 흔들린 자리에서 독자는 ‘나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된다. 내가 놓친 문장, 내가 지나친 계절, 내가 잊었다고 생각한 얼굴. 그것들이 정말 사라졌는지, 아니면 다른 갈래에서 아직 살아 있는지.


그 질문이 남는 한, 보르헤스는 이미 성공한 것이다. 그의 문학은 답을 주지 않지만 질문을 바꾼다. 시간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믿고 있었는가?. 그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시간의 문장을 읽을 준비가 된다.(수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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