꼽사리

by 세인트

TV에 유명한 정치인이 나오면 그 곁에 그와 같은 '끕'이거나 친한 동료들이 나란히 선다.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덕분에 자신들의 얼굴도 화면에 잡히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장면에는 반드시 뒤에서 슬금슬금 어깨를 들이밀며 끼어드는 사람이 있다. 앞에 선 사람이 짜증 난 표정으로 밀쳐내도 계면쩍게 웃으며 포기하지 않는다. 늘 하나마나한 소리나 하는 정치인들 나오는 뉴스는 그런 사람 찾는 재미로 본다. 숨은 그림 찾기는 댈 것도 아니다.


모 방송사 정치부 카메라 기자였던 친척이 하는 말이, 정치인이 9시 메인뉴스 카메라에 얼굴 한 번 나오면 10만 표가 생긴단다. 그러니 임기 내 이슈 하나 없어 화면에 나오지 못하는 '안 유명한' 정치인은 '많이 유명한' 정치인 옆에 '꼽사리'로도 화면에 찍히려 애쓴다. 그리고 그 순간을 미리 지시받은 비서관이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 지역구 사무실에 걸어 놓으면, 안 유명한 정치인은 유명한 정치인과 가까운 '준 유명한 정치인'이 되어 표를 지킬 수 있다.


'꼽사리'는 주류가 아닌 변방인데, 어찌어찌 편법이나 양해로 주류의 틈에 끼게 되는 것을 말한다. 꼽사리의 특징은 언제라도 주류에게서 쫓겨날 수 있으므로 눈치 백 단이다. 주류가 무엇을 원하며 좋아하는지 미리 알아서 챙겨야 한다. 이런 꼽사리는 정치판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 하다못해 아이들 사이에도 있다. 공부를 잘하거나 잘 생기거나 또는 아파트 평수가 넓은 집 아이들 사이에는 공부도 못하고 못 생기고 임대 빌라에 사는 아이가 하나쯤 꼽사리 끼어 따라다닌다.


커서 어른이 되어 동창 모임에 가도 이런 꼽사리는 있다. 이른바 잘 나가는 동창이 잘 나가는 자의 표준행동규칙을 지켜 뒤늦게 나타나면, 벌떡 일어나 제 자리를 내주며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잘 나가는 동창을 큰 소리로 다시 소개한다. "알지? 이번에 우리 친구 ㅇㅇㅇ가 상무로 승진했대, 박수!" 하며 제가 앉았던 자리에 방석을 깔아준다. 알기는 뭘 아나, 다들 저 살기 바쁜데.


그날 저녁 꼽사리는 잘 나가는 동창의 법인카드로 함께 3차까지 갈 수 있고, 모교, 동창, 의리, 친구라는 단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말과 술과 술집아가씨의 분 내를 범벅해 잘 나가는 친구와 우정을 다짐한다. 헤어지며 꼽사리는 잘 나가는 친구 택시를 잡아주고 친구 잘 부탁한다며 기사에게 요금까지 넉넉히 던져준다. "잔돈은 가지세요!"


가까스로 막차에 오른 꼽사리의 손에는 잘 나가는 친구가 편의점에서 집에 애들 주라며 챙겨준 하겐다즈 큰 통이 들려있다. 취한 정신에 두고 내릴까 하여 몇 번을 다시 들었다 놓았다한다. 그간 동네 편의점에서도 몇번을 들었다 놓았다만 했던 건데.

"역시, 잘 나가는 친구는 다르구나..."


이런 꼽사리들의 특징은 주류가 행여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틈만 나면 주류와 함께할 자리를 만든다. 카드를 긁어서라도 '공 치러' 가자든가, 잘 나가는 친구의 잘 나가는 친구들과 함께 단체로 세부 여행 계를 붓자든가. 잘 나가는 친구는 "그까짓 걸 뭘 계까지 부어? 그냥 날 잡아 가면 되지"한다.

"역시, 잘 나가는 친구는 다르구나..."


꼽사리의 그런 각고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아들놈 자대 배치 집 가까운 곳으로 하거나, 딸내미 이력서를 슬쩍 끼워 넣거나 하는 부탁에, 잘 나가는 친구의 "알아봐 줄게"하는 답을 듣는 때다. "우리 남편 친구들이 빵빵해"라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자랑하는 아내의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어쨌든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은 꼽사리도 그의 아내도, 아빠의 능력을 믿는 아들 딸도 모두 행복하다.


이 글을 보며, "맞아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 할지 모른다. 그게 하필 거울 보고 면도하는 때가 아니길 빈다. 그게 하필 거울 앞에 입 벌리고 마스카라 하는 때가 아니길 바란다.


따지고 보면 잘 나가는 '주류' 보다 못 나가는 꼽사리가 더 많으니 꼽사리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가. 그러니 인생은 원래부터 '꼽사리'로 설계된 것인지 모른다. 때로는 치사하고, 때로는 비궇하고, 또 때로는 눈치코치 보아야 살아지도록. 그렇게 설계된 인생이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다. 아닌 척 해도, 그렇게들 살아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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