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데스쁠라(Alexandre Desplat)

by 세인트

알렉상드르 데스쁠라


영화 '유령 작가'<The Ghost Writer)>의 초반부, 황량한 겨울 해변의 별장을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낮은 저음의 현악기와 건조한 목관 악기의 반복적인 음형으로 구성된다. 데스쁠라는 정치적 음모가 구체화되기 전까지 악기들의 음량을 일정하게 유지하여 관객이 스크린 속 풍경의 서늘한 감각을 받아들이게 유도한다.


음악은 불안한 정서를 장소 전체에 고이게 만들어 관객은 음악이 설정한 불길한 무게 속을 인물과 함께 걷는다. 여기서 음악은 오로지 섬의 고립된 환경을 표현하며,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의심의 깊이를 조절한다. 정치적 긴장이 서서히 차오르는 동안 소리는 그 긴장이 흩어지지 않도록 가두는 그릇이 된다.


이러한 정밀한 조율 방식은 영화 <더 퀸(The Queen)>에서 명확한 질서를 보여준다. 다이애나 비의 사망 직후, 왕실의 경직된 분위기와 대중의 슬픔이 충돌하는 장면에서 데스쁠라는 하프와 가벼운 현악 합주를 배치한다. 하프의 음들은 개인의 비극을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하프 특유의 짧은 잔향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고수하는 공적인 절제와 전통의 격식을 소리로 나타낸다. 음악은 슬픔과 냉정함이라는 서로 다른 성격이 한 화면 안에서 섞이지 않도록 칸막이를 세우는 역할을 한다. 관객은 음악이 만든 차분한 틀 속에서 인물들이 처한 복합적인 정치적 상황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순간에도 음악은 품격을 잃지 않는 단정한 태도로 서사의 중심을 잡는다.


시간의 흐름을 다루는 기술 역시 치밀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에서 피아노와 현악기는 시계추처럼 정확한 간격을 두고 반복적인 선율을 연주한다. 이 음표들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일정한 박자로 나타내는 것이다. 관객은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반복되는 흐름을 따라 시간이 일상을 통과하며 쌓이는 과정을 실감한다.


비극과 축복이 섞인 인물의 삶은 음악이 설정한 규칙적인 박자 속에서 전개된다. 데스쁠라는 삶의 기적적인 측면을 조명하기보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인물을 휩쓸고 지나가는 일관된 움직임에 집중한다. 인물의 나이가 거꾸로 흐르는 기이한 설정 속에서도 음악이 지키는 이 일정한 속도감은 판타지를 현실세계로 끌어온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에서 보여주는 경쾌함은 계산된 속도감의 결과다.. 데스쁠라는 발라라이카와 짐발롬 같은 동유럽 민속 악기들을 활용해 짧고 날카로운 타격음을 연속적으로 배치한다. 이 소리들은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의 절도 있는 동작, 그리고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대칭적 미장센과 일치한다. 음악은 인물들의 빠른 대사와 정교한 동선을 청각적으로 정리한다.


화면 속 소동이 거세질수록 음악의 질서는 더욱 견고해지는데, 이것은 활기 넘치는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린 기억과 상실의 정서를 붙잡아두는 닻이 된다. 웃음과 슬픔이 동시에 작동하는 힘은 이 정교한 리듬의 배분에서 나온다. 악기들의 이국적인 소리는 환상적인 배경을 표현하는 동시에, 사라져 가는 시대에 대한 애틋한 시선을 담아낸다.


데스쁠라의 음악적 절제는 정치 스릴러 <킹 메이커(The Ides of March)>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핵심이 된다.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에도 악기의 편성을 늘리거나 볼륨을 키우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제한된 현악 패턴만을 집요하게 반복하면서 불안한 느낌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음악은 감정이 폭발을 지연시키면서 관객은 오히려 상황이 불안정하게 지속되는 과정에 집중하게 되고 이야기에 몰입한다. 소리는 인물의 야망이나 배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서 있는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전달할 뿐이다. 사건의 전개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관객의 신경을 자극하며 극적 몰입을 돕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아르고(Argo)>에서도 그는 소리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중동 탈출 작전이 진행되는 긴박한 시퀀스에서 현악기의 짧은 음형을 낮은 음역대에서 반복하며 선택의 위험을 차분하게 유지한다. 음악은 이미 발생한 위험 요소들이 제자리에 머물도록 만든다. 공항 검문소 장면에서 관객의 심장을 조이는 것은 웅장한 합주가 아니라 단조롭고 일정하게 흐르는 소리의 압력이다. 사건의 무게는 음악이 한 발 물러설 때 선명해진다. 결과에 대한 섣부른 암시 없이, 오직 현재 진행되는 위기 상황의 상태만 유지함으로써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에서 음악은 물과 결합한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 짓지 않는 선율은 영화 전체가 하나의 호흡 안에서 흐르도록 돕는다. 여기서 음악은 인물과 공간을 감싸는 배경 그 자체다.

관객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눅눅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물속에서 소리가 전달되는 먹먹한 특성을 현악기와 아코디언의 부드러운 떨림으로 나타내며, 기이한 로맨스가 현실의 논리를 넘어 신화적 공간으로 확장되도록 유도한다.


알렉상드르 데스쁠라는 음악이 장면을 장악 것을 경계한다. 그는 음악이 장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들어 관객이 영화 전체의 호흡을 기억하게 만든다. 음악이 감정을 대표하거나 과도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태도는 의도적이다. 요한 요한슨이 소리로 시간을 늘리고 벤 프로스트가 소음으로 타격을 가할 때, 데스쁠라는 음악을 통해 영화의 균형을 유지한다. 그는 감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주변의 번잡함을 정리하는 데 집중한다. 이런 중립적인 태도는 관객이 영화의 서사와 이미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강력한 장치가 된다.


데스쁠라는 음악이 장면의 조절자 역할을 하는 것에 충실하다. 그는 강렬한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헌신하며, 눈에 띄지 않게 장면에 스며드는 정밀한 조율로 음악의 가치를 증명한다. 그의 선율은 장면의 뒤편에서 조용히 숨 쉬며, 우리가 영화를 보는 동안 느끼는 감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들어준다. 결국 관객이 경험하는 것은 음악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음악이 빈틈없이 메워놓은 영화의 완결성이다. 서사적 연결과 조율에 충실한 그의 음악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향처럼 남아 영화의 온도를 오래 지켜준다.(수필/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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