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며

by 세인트

이 유명한 작품들에 감히 또 다른 해석을 덧붙이는 일이 과연 필요할까? 그러나 작품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읽는 우리의 시간은 계속 변한다는 사실 하나에 기댔어 이 글을 썼다.


프루스트의 문장을 다시 보며 과거가 어느 날 갑자기 현재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떠올렸다. 마들렌느의 향기처럼 아주 사소한 감각이 어린 시절의 골목과 빛의 질감, 그리고 오래 전의 감정을 한꺼번에 되살렸다. 그때 시간은 역류하지도 멈추지도 않으며, 현재라는 투명한 막을 뚫고 뒤에서부터 조용히 스민다.


가와바타의 <설국>에서는 눈 내리는 풍경이 하나의 계절을 통째로 머금은 시간으로 변한다. 눈 덮인 마을의 정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침묵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감정들이 얇게 쌓여 있는 층이다.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견고했던 세계가 붕괴하기 전의 공기와 예감을 작별 인사처럼 읽어 내려갔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어느 날 아침'으로 요약되는 급격한 시간의 단절을 보았고,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에서는 여러 인물의 의식이 같은 하루 위로 겹쳐지며 시간의 선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경험을 맛보았다. 쿤데라와 카뮈의 세계를 지나며, 삶의 선택이 시간 위에 남기는 무게와 공허를 함께 바라보기도 했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너무 늦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 한 집사의 저녁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시점 이후의 시간'이 어떤 색을 가지게 되는지 보았다.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와 파묵의 <순수 박물관>,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모리슨의 <빌러비드>, 그리고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서로 전혀 다른 시대와 나라의 작품들을 한 책 안으로 불러 모았다. 그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오직 하나, 시간에 대한 문장들이다.


어떤 문장은 다시 깨어나는 과거를 보여 주고, 어떤 문장은 멈춰 버린 순간을 오래 응시하게 하며, 또 다른 문장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결과를 비춘다. 어느 문장은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폭력의 시간을 붙들어 두고, 어느 문장은 지하의 압축기처럼 세월을 한 큐브에 눌러 담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스스로를 속이는지를 일깨우는 문장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장들이 완성되는 순간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독자의 시간 속에서다. 누군가에게는 프루스트의 한 줄이 오래 전의 어떤 오후를 불러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이시구로의 마지막 페이지가 자기 삶의 어느 저녁과 겹쳐질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줄리언 반스의 회한을 읽으며, 언젠가 자신도 외면했던 예감을 떠올릴지 모른다.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포괄하려는 야심 찬 연대기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내내 확인했다. 오히려 이 책은 몇 개의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는 작은 정거장이라 할 수 있다. 그 정거장에서 각자의 시간표를 한 번 더 들여다보기를 원했다. 나는 어떤 시간에서 도망쳤고, 어떤 시간을 붙들려했으며, 어떤 시간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


책장을 덮으면 이야기는 끝나겠지만 시간은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은 이미 한 번 누군가의 삶을 통과해 왔고, 이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으로 옮겨갈 것이다. 언젠가 독자가 자신만의 '시간이 들어 있는

'문장'을 발견해 적어 내려간다면, 이 책의 역할은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들이 있다. 우리가 잊었다고 믿는 기억들, 아직 말로 꺼내지 못한 후회들, 언젠가 다시 돌아올 어떤 예감들. 이 책이 그 시간들에게 아주 작게나마 불을 밝혀 주었다면, 그리고 그 불빛 아래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제 남은 이야기는, 이 책을 덮고 난 뒤 각자의 시간에 달려 있다.(수필/문학)


*만세! 드디어 이 글을 완성했습니다. 정확히는 준공이라 해야겠네요. 두고두고 다시 수정을 할 테니까요. 하지만 일단 마무리를 하니 속 시원합니다. 처음부터 책으로 내기위해 썼으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부족한 글이니 많이 흉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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