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도쯤 되는 불볕더위 날에, 35도 도수 안동소주를 맛보았다. 안동 구시장 찜닭골목 모 식당에서다. 타는 듯이 목젖을 적시면서도 뒤끝이 깨끗한 안동소주는 기름진 찜닭과 궁합이 맞았다.
기름진 안동찜닭을 먹은 우리에게 자두는 최고의 입가심 후식이었다. 모 선배가 사서 나눠 준 자두를 나는 바로 먹지 않고 이리저리 돌리며 사진에 담았다. 그런 다음 자두를 한입 씹었다. 시큼함과 싱그러움이 더위를 날려버릴 정도였다.
8월 24일 내가 속한 문학기행반 동아리는 안동으로 ‘이육사 문학기행’을 떠났다. 이육사문학관이 도산서원 위쪽 낙동강 옆에 자리 잡고 있어서다.
문학관 입구 근처에 청포도가 알을 키우고 있었다. 이육사문학관답다.
나는 청포도와, 점심식사 후 먹은 자두를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육사문학관 손병희 관장의 ‘청포도’ 시 해설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이육사의 시 ‘청포도’ 중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청포도(靑葡萄)의 ‘포(葡)’ 자는 ‘포도 포’ 자이고, 청포(靑袍)의 ‘포(袍)’ 자는 ‘두루마기 포’ 자다. 전혀 다른 것이다. 나로서는 육사 시인이 ‘청포’라고 하는 같은 우리말 글자 단어 두 가지로 유희를 즐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손 관장은 당시 조선에서 청포도를 재배했느냐 하는 사실, 보통 하얀 옷(두루마기)을 입고 다니지 누가 ‘푸른 옷’을 입고 다니느냐 하는 사실은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작가는 있는 사실을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재구성하는 사람”이므로. 만약 이 시에 ‘청포’(푸른 옷)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이 시는 그리 흥미롭지도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또 관장은 멀리 있는 하늘 즉 우주가 포도알 하나하나에 박혀 있다 했다. 그러니까 포도알을 먹는 것은 우주를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두를 먹은 것도 우주를 먹은 것이다. 이렇게 색깔과 공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언어의 맛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 시를 ‘항일투쟁을 노래한 시’라고 믿고 있고 이미 굳어진 사고가 돼버렸다. ‘청포 입은 손님’을 조국의 광복으로 해석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관장은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했다. 민족시인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민족시인’의 시는 국제적인 공감을 없을 수 없고, “이육사는 한국에만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했다. 그래서인지 강의 제목이 '칼날 위의 서정시'였다. 정말 멋지고 적절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숙소를 안동 ‘예끼마을’에 있는 ‘선성현문화재단 한옥체험관’으로 정했다. ‘ㅁ’ 자 형 한옥 구조의 멋스러움, 솟을대문, 크고 넓은 현대식 시설의 방, 어스름한 주변이 있는 ‘마당 깊은 집’이었다. 체험관 앞이 바로 ‘안동호’다. 아침에 보면 호수 건너편 숲과 산이 다도해의 섬들처럼 포개져 있어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저녁 프로그램이 끝난 후 마당에 나오니, 한옥지붕들 사이로 직녀성(베가)과 견우성(알타이르)이 보였다. 데네브라고 하는 별과 함께 ‘여름의 대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처마와 처마 사이 한가운데, 마당 위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청포도’ 시를 다시 만난 우리에게 그날 밤 별은 하나의 포도알이었다.
참! 손병희 관장의 강의 후, 우리는 이육사 시인의 막내딸 이옥비 여사의 추억담을 들었다. 이육사 시인이 1944년에 옥사했을 때 여사는 세 살이었다.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어릴 적엔 말을 잘 안 하는 소녀였다. 늘 긴장하고 조심했던 탓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너의 아버지는 떳떳하신 분이셨으니 당당하게 살아라”라는 말을 듣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단다. 여사의 삶을 바꾸고 지금까지 큰일을 해오게 한 큰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멋쟁이셨다. 말술을 드셨어도 주정은 없었다. 그리고 친척들이 다 같이 모이는 통에 댓돌에 신발이 가득하면 “무릉도원 같다” 하셨다.
한밤중 나를 포함해 우리는 한쪽 방에서 명인이 만들어 호리병에 담은 40도 안동소주를 중심으로 뒤풀이를 가졌다. 우리 대화소리만이 소음이 되는 아늑한 밤을 보냈다. 반면 또 다른 방에서는 ‘매운 술’(시인의 표현) 없이도 언니 동생 들끼리 얼마나 많은 이야기꽃을 피웠을까 생각하니 흐뭇했다. 마루 아래 댓돌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은 밤새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육사 시인이 말한 무릉도원의 밤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