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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W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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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witter Oct 19. 2023

W의 연애 ¹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오직 마음의 안쪽에만 달려 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오직 마음의 안쪽에만 달려 있다."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이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출처는 알 수 없다. W와의 얘기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꽤나 오래전, 대인 관계에 대한 대화였다.


 "사람 마음이란 게 한쪽만 열려있는데 이어질 리가 없는 거잖아? 양 쪽 문이 다 열려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근데 가끔씩 그걸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억지로 상대방 문을 연다고 열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뭐... 아무리 두들긴다고 해도 열어줄 마음이 없으면 그냥 거기서 끝인 거지."

 "그치. 근데 이제 그러고 있잖아? 그러면 자기랑 생각이 달랐다던가, 아니면 이젠 질렸다던가 하면서 그냥 문 닫고 가버려. 나는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건데, 그 차이를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자기랑 다르면 가버리는 거야."

 "흠, 친구로는 싫은 건가."


 꽤나 진부한 주제였지만, W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나름의 신선함이 있었다. 이성끼리의 친구 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다양한 논리(?)들을 억지로 만들어 버릴 만큼 나름 체계적인 본인만의 철학이 느껴졌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옹호하며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나는 네가 좋아.", "나는 네가 싫어."처럼 칼같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두루뭉술하던 생각이 조금씩 굳어져 감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문으로 비유한다면, 그 문 너머에는 개인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문 사이로 사람이 오간다면 분명 문 밖을 바라볼 창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 W의 말의 요점이었다.

  마치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같았다. 인생이라는 도로 위의 '나'라는 차는 내 옆을 지나는 많은 차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옆차들과 창문을 열고 간단히 담소를 나눌 수 있다. 행선지가 같을 수도 있고, 아니더라도 잠시 같은 길을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갈래길을 만나 헤어질 때는 손을 흔들어 줄 수도, 혹은 비상등을 한 번 깜빡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도로 위 차가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잠시 정차해 둔 차의 문이 열려있다고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다.

 얘기나 해 보자며 창문을 열어보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만, 창 밖으로 보여주는 미소에 마음을 뺏기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창문조차 열어주기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끔은 창문을 닫고 동승객과의 시간을 소중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행선지도 다르고 서로 달리는 차선도 다르지만, 가끔 같은 휴게소나 졸음 쉼터에서 마주하면 반가운 경우도 있다. W와의 관계가 그러했다.




 W와 알고 지낸 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본의 아니게 W의 연애사를 구구절절 알게 되었다. - 걔 중에는 내 지인들도 섞여 있고, 그로 인해 내 친구 목록이 꽤나 협소해진 적도 있지만 대부분 스쳐간 인연이었기에... -  당연하게도 W의 모든 연애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에게 W라는 인물은 꽤나 흥미로운 존재면서, 또 한 편으로는 동경할 만한 모습도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골똘히 관찰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W의 연애는 재밌다. 재밌었고, 재밌을 것 같다. 당사자에게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W의 연애`를 소재로 글을 써도 되냐는 말에 "하던 일 다 때려치우더라도 그거 먼저 써."라고 했으니 이 정도는 달게 받아라. W.


 W의 연애가 재밌는 이유는, 무엇보다 다채로움에 있었다. 나를 포함한 주변인들의 연애는 대체로 재방송의 연속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메여 살거나 과거의 실수를 답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감정의 기복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개복치가 되어버렸지만, 과거에는 별다른 감정의 기복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기에 연애라고 하더라도 그저 일상에 행복이 더해진 정도였다. 그런 입장에서 W의 연애는 뭐랄까, 옴니버스 구성의 로맨스 멜로 스릴러 드라마 페이크 다큐였다. 물론, 그것도 처음부터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매 회차가 진행될수록 하나씩 주섬 주섬 주워오더니 어느새 이 만큼이나 잔뜩 쌓아놓았다. 산책 나간 골든 레트리버가 나뭇가지를 하나씩 주워와서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은 걸 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무튼 W가 주워온 나뭇가지들 중, 가장 오래된 나뭇가지는 학창 시절의 연애였다.


 한창 대학을 다니던 때의 W와는 그다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다. 당시엔 내가 군대에 있기도 하였거니와 당시의 W의 연애는 풋풋한 대학생의 연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꽤나 장기간 연애를 하였는데 끝 마무리는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저 지나가는 듯한 연애였다(제삼자 입장에서는). 그 전이였는지, 아니면 그 후였는지 W는 그렇게 몇 번의 잔잔하게 연애를 시작했고, 끝마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크게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저 '친구가 연애를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끝나있었다.'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알게 된 것이 있는데 W는 꽤나 정리에 진심인 편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거나 연이 끊긴 인물과의 연락처는 말끔히 지워버리거나 정리하였다. 끝이 좋은 이별이 어딨겠냐만은, 그나마 내가 아는 한에선 말끔히 이별하게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연애와 관계없이 끊어진 인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W의 습관과도 같은 연락처 정리를 한 발짝 앞에서 -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연락처 정리하고 온다며 카톡이 삭제될 것이라는 걸 말하고 난 뒤 사라지는 것을 - 보고 있자면 언젠간 나도 저렇게 휩쓸려 나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은 어느 순간 (알 수 없음)이 되어있는 W를 확인하고는 새로 생성된 계정으로 내가 하려던 말이나 던져놓는 정도가 되었지만 아무튼... 

 그러던 중,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 W의 대인 관계 중 유일하게 연애의 끝이 연락처 정리로 이어지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내 대학 동기 Y였다. W와 Y의 사이는 X였다. 꽤나 가까이 붙어 지냈지만, 그 중간 과정은 부정이었고, 얼핏 보면 서로 닮은 듯했으나 결과는 결국 X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W가 내가 알고 있던 모습보다 꽤나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사회로 나가 다양한 경험을 하며 성숙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W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정확히 그 전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W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조금 변해있었다. 강인한 줄만 알았던 W가 곧 부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은 마치 고전 동화의 교훈처럼, 너무 강인하면 부러지니 어느 정도는 부드러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W 본인도 그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때부터 W의 연애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나는 역리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관상을 공부한 적도 없다. 진지하게 얘기한 것은 아니었고,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우스갯소리였었다. 그럼에도 사람 보는 눈은 다 비슷비슷한 것인지 가끔 W가 가져오는 소개팅 대상, 혹은 마음에 두고 있는 대상, 혹은 최근 친해진 친구들의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얼추 눈대중으로 맞추었던 적이 있다. 이제는 서로가 성숙한 성인이 되어, 전혀 모르는 타인의 신상을 공유하는 행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나름의 콘텐츠였다. 그렇게 물어보는 W의 나뭇가지들은 꽤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꽤나 준수한 외모, 그리고 그 준수한 외모를 본인이 알고 있는 듯한 자신감 넘치는 표정들. 어느 정도 신경 쓴 티가 역력한 패션 감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

 W는 자신이 얼빠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매번 꽤나 훈훈한 외모였던 것은 맞지만 외모에서는 특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동일했던 것은, 어떠한 분야든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인지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W의 연애를 글로 써 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이 사실을 인지하게 된 시점이었으니 정말 최근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W의 연애사에 흥미를 느꼈던 것도, W라는 인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어느 정도는 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인물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동경이나 존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호감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W를 꽤나 동경하고 있었다. 최고가 아닐지라도 W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어떠한 일이든 잔뜩 해 나가고 있었다. 동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유유상종인 것인지, 내가 W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무엇이 우선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W는 그러하였다. 다만 W는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서두에서 이야기하였듯, 사람의 마음의 문이라는 것은 한쪽에서 열어두었다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두드린다고 해서 항상 열리는 24시 편의점의 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마음대로 열 수 있도록 손잡이가 바깥쪽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동경의 대상은,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사이드 스텝이 없는 대형 SUV의 문짝과 같다. 저 높은 곳에서 굳건히 닫혀있는 그렇다고 쉽게 열수도, 설령 열려도 오르는 것부터 벅찬, 거기에 무겁기까지 한 문짝이었다. W는 달랐다.

 W는 두들기고 또 두들겼다. 때로는 두들기는 수준이 아니라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참 재밌는 사람이었다. "어라? 사람이 저렇게까지 들이박아도 되는 거였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달려들 때도 있었다. 그 끝이 항상 달콤하지만은 않았지만, 적어도 당돌하고 단단한 W의 모습만은 잘 느껴졌었다. 그렇게 들이박는 W는 항상은 아니어도 언제나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을 쟁취해 냈다. 그것이 사랑이든, 연애든, 그 외 무언가이든. 그리고 그 일련의 사건들이 지금의 좌충우돌 W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이 깊게 남은 이야기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W는 지금 솔로인지 썸인지 연애 중인지 알 수 없는 슈뢰딩거의 연애 상태에 놓여있다. 즉, 앞으로 이야기할 내용들은 연애 이야기가 무릇 그렇듯 이미 결말이 난 이야기들이다. 


 이미 여러 번 W의 연애, 혹은 그 시작의 신호탄(이면서 동시에 폐막 신호탄)을 알리는 이야기를 들어서 W의 연애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 시들해지던 무렵, 이번에는 겉으로 보기엔 꽤나 듬직한 나뭇가지를 한 번 물어온 적이 있었다. 문제는 속이 썩어서 텅 빈 나뭇가지였다는 것인데... 이 당시의 W는 폭주 기관차 마냥 달리고 있을 때였어서 여기저기 온전한 곳이 하나 없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오죽하면, W에게 조금은 천천히 사람을 알아가 보는 건 어떠냐고 말을 건넬 정도였다. 안 그래도 이 일이 있기 직전, 마음껏 들이박다가 나가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 여파로 한바탕 주변인 정리를 끝마친 시점이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W는 멈추지 않았다. 결말은 직전의 사태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지난번처럼 무지성 돌진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고, 꽤나 젠틀하고 계획적이고 점잖게 정제된 사람인 줄 알았던 상대방이 예상을 웃돌 정도로 망가져버린 모습을 보여서 진절머리가 나서 물러난 것이었다. 


 "... 진짜 웃기지 않냐?"

 "쉽지 않네."

 "야, 그래도 속 시원하다. 차라리 어중이떠중이로 뭉개지기만 하다가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이게 나은 것 같아. 뭐 돌아보거나 미련이 생길 건더기조차 안 남을 정도로 시원하게 추한 모습을 보니까 정이 싹 달아났어. 괜히 서로 알아가네, 뭐 하네 하면서 지지부진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래, 잘 걸렀네. 그럴 줄은 전혀 몰랐는데."

 "일할 때 보면, 덜렁거리는 부분이 없잖아 있긴 했는데 그래도 뭐랄까 되게 단단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그렇겠지, 서른도 안된 나이에 서울 한 복판에서 카페 사장하고 사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지?"

 "그런데 짜잔, 절대란 건 없었습니다."

 "어어, 맞다. 자기가 술 먹고 그 난장판 피워놨던 걸 기억은 할까? 아침에 아무렇지 않게 연락한 거 보면 전혀 기억 못 하는 것 같더라고."


 사람이란 건 참 어려운 생물이었다. 반짝이는 매력에 홀리듯 달려가보면, 태양인줄 알았던 종착지가 희미한 달빛이어서 실망한다. 그렇다고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가면서 익숙해져 가다 보면 밝지는 않더라도 은은하게 나만을 비추던 스포트라이트였던 대상이 "사실 난 배트맨을 부르기 위한 배트 시크널이었어!" 라며 정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참,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W도 약간 정신이 혼미해져 있어 보였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후에도 또 비틀거리면서 새로운 인연을 찾아 흩날리고 있었다. 그런 W를 보면서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 본받고 싶을지도 라고 생각한 나도 정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W는 이리저리 방황하며 다양한 나뭇가지들을 들고 오고 있었고, 다음 나뭇가지는 그래도 아무거나 주워 오지는 않았는지, 다소 신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W의 연애 - 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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